여름의 꼭대기에서 겨울을 생각한다. 몇 해 전, 가야산 국립공원의 생태탐방원에서 이틀 묵은 적이 있다. 부모로서 나는 후한 점수를 받을 리 없다고 인정하지만, 그래도 하나라도 잘한 걸 꼽아야 한다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에게 생태와 환경에 대한 관심을 틔워주려 애썼다는 것이다. 보육기관을 택할 때도 자연 친화적인 어린이집을 택했고, 가정에서도 소박한 수준이나마 실천을 강조하는 편이다. 생태탐방원이란 델 여행지로 정한 것도 그 연장이었다.
오. 그렇다고 내가 자연을 깊이 이해하는 것도 아니요, 환경주의자는 근처에도 못 간다. 심지어 갈매기와 오리도 구분하지 못해 망신만 당하는 사람이니까. 산책 중에 만난 그 새를 나는 오리라고 확신했지만, 챗지피티와 동료 소설가에게 교차 검증해 봐도 내가 들이민 사진은 갈매기라는 것이었다.
‘갈매기가 온천천엔 왜 왔냐고…’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운전대를 잡은 손에 안간힘을 주었다. 눈 쌓인 산길을 운전해 본 적 없는 일개 도시민으로선 가야산의 꽝꽝 언 눈길을 오르는 것이 생에 가장 아찔한 어드벤처였다. 그때 난 도시 한복판에 날아든 갈매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진맥진했다. 이틀이 어떻게 지났는지 흐리마리하지만, 그곳에서의 마지막 밤만은 또렷하다.
가본 적 없는 몽골 평원의 하늘처럼 쏟아질 듯 뿌려놓은 별들을 올려다보던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꽝꽝 언 숨을 뱉으며 아이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무려) 두 가지 요구가 있었는데, 내일 집에 꼭 가야 하냐는 호소가 일 번, 눈송이 친구를 집에 데려가자는 것이 이 번이었다. ‘너는 아비가 그렇게 당한 것을 잊었느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우는 아이 앞에선 삼켜야 했다. 나는 타이어에 체인 감는 법을 검색하며 아내와 딸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아내는 말했다. 모든 아이에게 엄마 아빠가 있는 것처럼, 눈송이도 엄마눈, 아빠눈이 있지. 그들은 이곳이 집이야. 눈은 이 가야산이라는 집에서 녹아 땅으로 스밀 거야. 그 물은 여기 사는 나무를 키우고, 나무는 다람쥐를 먹이고, 다 먹지 못한 열매는 어딘가 숨겨두었다가 다시 어린나무가 되겠지. 두 사람은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봄과 여름을, 가을과 다시 돌아올 봄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참 어릴 적부터 아이는 장난감엔 흥미가 없는 편이었다. 무엇이든 사주고 싶은 마음에 억지로 꼭 하나는 집어 오게 해도 오래 가지고 놀 줄 몰랐다. 그러던 아이가 하루는 놀이터에서 돌멩이를 집에 데려가자고 떼를 써 곤란하게 한 적이 있었다. 어느새 이름까지 붙여서는. 그 정도로 곤란이냐 하겠지만, 돌도 가져오고, 낙엽, 썩은 나뭇가지도 주워 오니 말리긴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는 사람이 아닌 것도 사람으로 보았다. 아이는 인간으로부터 가장 먼 돌멩이조차 친구로 끌어안지만, 어떤 어른은 사람도 사람이 아닌 것으로 대한다. 어른의 세계는 끊임없이 피아를 식별하고, 위계를 나눈다. 가진 자와 빈자, 남과 여, 늙은이와 젊은이, 인간과 자연, 중앙과 지역, 제국과 민족 등의 이항대립은 근대적 분열이 낳은 식별이다.
이 원고를 쓰는 책상 앞엔 ‘自他不二’라는 네 글자가 붙어있다. 나는 오래 믿어왔다.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모시지 않고, 나로부터 가장 먼 세계, 가장 먼 타자의 이질성을 포용하는 개방성이야말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자질이라고. 이 개방성은 구조주의의 난폭한 분류를 뛰어넘는다. 부산에 사는 중년 남성이 쓴 소설 속에 이국의 소녀를 등장시키게 하고,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처럼 거대한 비극 앞에 그들을 ‘위해서’ 쓰겠다는 오만을 버리게 하며, 작가인 ‘나’를 해체하여 유가족이 되게 만든다. 나아가 망자(亡者) 자체가 되기도 한다. 모르긴 몰라도 한강 작가의 작품이 바로 이 ‘되기’의 수행을 보여주지 않는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좇던 질문은 이즈음에 와서 ‘무엇이 문학이 될 수 있는가’로 옮아왔다. ‘사람 아닌 것’에 이르기까지 되도록 멀리 경유해야만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재귀적인 물음에 응답할 수 있는 것처럼, 지역은 어디까지나 중앙을 강하게 의식하는 자에게 유효한 말이다. 그러나 범주화하는 외부를 의식하지 않는 자에게 지역은 언제까지나 중앙이다.
땡볕 아래서 가야산의 눈송이를 생각한다. 하루도 훌륭한 아버지였던 적이 없었음에도 아이는 매 하루 자란다. 내린 눈은 녹겠지만, 아이의 동심 안에선 오랫동안 녹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