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사람들이 머무는 언덕_낙수의 언덕

글. 박보은

낙수의 언덕은 어떤 계기로 시작된 공간인가요?

처음부터 북카페를 열겠다는 뚜렷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저만을 위한 공간, 혹은 함께 월세를 나누는 공유 오피스 같은 공간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준비하는 동안 동네 주민분들이 하나둘 찾아오셔서 말을 걸어주시고, 책을 가져다주시기도 했어요. “책을 팔아보면 어떻겠냐”, “커피도 같이 팔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금의 책방 겸 카페가 되었어요.

처음 생각했던 모습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곳이 저만의 공간이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쓰는 공간이 되었다는 점이에요. 변하지 않은 점은 낙수의 언덕이 여전히 저에게 ‘정 붙일 공간’이라는 거예요.

‘낙수의 언덕’ 입구와 아늑한 내부 전경

공간을 준비하면서 지금의 분위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이 공간을 처음 만난 건 2024년 여름이었고,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한 건 그해 가을 무렵이었어요. 페인트칠을 하고 바닥을 정리하고, 책을 들여놓으면서 두 달 정도 직접 공간을 만들어갔어요.

처음에는 거의 빈 공간에 가깝게 열었어요. 그런데 문을 열어두니 동네 분들이 지나가다 “여기는 뭐가 생기냐”고 물어보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주고 가셨어요. 그렇게 하나둘 채워지다 보니 지금의 낙수의 언덕이 된 것 같아요. 손님들이 가져온 책, 건네준 이야기, 남기고 간 물건들이 쌓이면서 지금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낙수의 언덕’이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낙숫물이 한자리에 오랜 시간 떨어지면 그 자리가 깊게 패이잖아요. 이곳에 오시는 분들을 낙수에 빗대어 생각했어요. 이 공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각자의 세계가 조금 더 깊고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언덕’은 비빌 언덕이라는 말에서 가져왔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고, 멍하니 있어도 괜찮은 곳. 잠시 기대어 있을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곳을 찾는 분들이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꼭 책을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각자의 방식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이정민 대표와 여유로운 ‘낙수의 언덕’ 풍경

낙수의 언덕에서 책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저는 중고책을 좋아해요. 중고책에는 누군가 끼워둔 나뭇잎이나 은행잎, 앞장에 적힌 날짜와 이름, 짧은 문장 같은 흔적이 남아 있을 때가 있거든요. 한 사람에게 머물렀던 책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느낌이 좋아요. 그래서 이곳의 책들은 단순히 읽히거나 판매되는 물건이라기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처럼 느껴져요. 누군가가 책을 소개하고, 또 다른 사람이 그 책에 관심을 갖는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생기거든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을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가까운 이웃 할머니와의 일상이에요. 할머니는 파전, 비빔밥, 시래기국 같은 음식을 챙겨주시고, “따뜻할 때 먹어야 된다”는 말도 잊지 않으세요. 퇴근길에는 건넛집 창문으로 저를 보시고 “가나?” 하고 인사해 주시고요.

낙수의 언덕 안에 있는 글씨들도 그 할머니가 직접 써주신 거예요. 처음에는 제가 썼는데, 할머니가 보시고는 직접 써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이 공간 안에는 할머니의 손길도 함께 남아 있어요. 이런 장면들이 낙수의 언덕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특별한 사건이라기보다, 매일 오가는 인사와 챙김, 작은 마음들이 쌓여 이 공간의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간의 흔적들

낙수의 언덕에서는 커뮤니티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나요?

낙수의 언덕의 커뮤니티는 제가 계획해서 만든 것이라기보다, 손님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에 가까워요. 누군가 이 공간에서 무엇을 해보고 싶다고 하면 대부분 “해보세요”라고 말하는 편이에요.

시 모임도 그랬고, 낭독도 그랬고, 노래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그랬어요. 어떤 손님이 자신이 좋아하는 텍스트를 함께 읽고 싶다고 하면, 저와 듣고 싶은 손님들이 모여 함께 읽어요.

근처에 사시는 할아버지는 제가 장사가 안 되는 줄 알고 걱정이 되셨는지, 손님을 모아보겠다며 종이접기 수업을 제안하셨어요. 수업료는 받지 않고, 손님들은 차값만 내고 오면 된다고 하셨죠.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작은 제안이 모임이 되고, 그 모임에서 다시 관계가 생겨요. 저는 그게 낙수의 언덕다운 커뮤니티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낙수의 언덕만의 관계는 무엇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취향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이곳에는 문학, 시, 영화, 예술 관련 책들이 있고, 제가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나 전시 티켓도 붙어 있어요. 손님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본 적 있는 전시의 흔적을 발견하면 반가워하세요. “이것도 좋아하세요?” 하고 말을 걸 수 있는 작은 구실이 생기는 거죠. 처음에는 제 취향을 보고 친밀감을 느낀 분들이 오시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도 손님들의 취향을 보게 돼요.

손님들이 책을 추천해 주시고, 영화를 알려주시고,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시기도 해요. 그렇게 서로의 취향이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낙수의 언덕에서는 취향이 대화가 되고, 그 대화가 다시 관계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운영자와 방문객의 취향이 묻어나 있는 서가와 소품들

망미동이라는 동네는 낙수의 언덕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무엇보다 이 동네는 다정해요. 할머니들이 음식을 챙겨주시고, 동네 분들이 지나가다 인사를 건네주시고, 처음 보는 분들도 문을 열고 들어와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냐”고 놀라워하세요.

낙수의 언덕을 통해 망미동의 골목을 더 걷게 됐다고 말해주신 손님도 있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 공간이 단순히 카페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망미동을 다시 보게 만드는 작은 입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이 자리에서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이곳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 나누었던 대화, 지나가다 문득 들어온 순간들이 쌓여 있으니까요.

앞으로 낙수의 언덕이 어떤 공간으로 이어지길 바라시나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특별히 거창한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반가운 얼굴이 점점 많아지는 공간이었으면 해요. 이곳은 밖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잘 보여요.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올라오는 게 보이면 벌써 반갑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또 그 사람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밖에서 속 시끄러운 일이 있더라도 이곳에 오면 잠시 분리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고, 멍하니 있어도 괜찮고, 자기 생각만 하거나 보고 싶은 것만 보아도 괜찮은 공간이요.

누구나 마음 편히 머물다 갈 수 있는 망미동 골목 안의 다정한 아지트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낙수의 언덕에는 일상의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지나가던 동네 주민이 문을 열고 들어와 “이 골목에 책방이 있는 줄 몰랐다”며 공간을 둘러보고, “음료를 주문하면 책을 읽을 수 있냐”고 묻고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이어 동네 할머니와 아이의 발걸음도 공간으로 이어졌습니다. 낙수의 언덕 곳곳의 글씨를 써주고, 앞으로는 서예 수업까지 함께 열 예정이라는 이웃집 할머니와의 관계는 이곳이 단순히 책과 커피를 파는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낙수의 언덕은 망미동의 골목 안에서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누군가에게는 새롭게 동네를 발견하는 입구가 되며, 또 누군가에게는 자기 취향과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는 작은 아지트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곳은 책을 읽는 장소이면서, 이야기가 머무는 장소이고,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아지트이자 책과 공간을 사랑하는 이들이 잠시 쉬어 가는 언덕으로, 낙수의 언덕이 오래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인터뷰. 이정민
낙수의 언덕을 운영하며 책과 커피,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머무는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글. 박보은
로컬 생산자.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부산에 대한 이야기와 연구를 기록하며 써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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