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 - 2024 공감그리고 겨울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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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못 참겠는데?
아니 좀만 더 기다려봐, 더 조려야 한다고
닭고기 뿌리채소 조림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했다. 이제 다 됐나? 싶을 때 한 번 더
참아내야 겨우 완성되는 법. 국물이 다 졸아들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데,
함께 일하는 오 씨는 참지 못하고 계속 보챈다.
무슨 점심 하나를 두 시간이나 하고 있어
어허, 그냥 점심이라니! 다 연구고 공부라고
맛있는 점심을 해주겠다며, 동시에 겨울 제철 음식 연구도 할 수 있다며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닭고기와 뿌리채소를 준비해 점심 당번을 자처했건만,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완성을 못 한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미처 계산을 못 했다.
그래도 기왕 시작한 음식, 타협할 순 없다. 최고의 맛을 뽑아낼 때까지.
눈치 없는 우엉이며 연근, 당근이 물렁해질 생각을 안 한다. 역시 뿌리채소의 억센 성질,
쉽게 약해지지 않는구나. 땅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뿌리채소들은 겨울이 깊어질수록
땅 밑 더 깊게 뿌리내려 굳세게, 단단하게 익어감을 느낀다.
겨울이 되면 자연 만물은 밖으로 내뿜던 기운을 서서히 안으로 응축하기 시작한다.
땅으로, 굴로, 깊은 바다로 숨어들어 에너지를 모은다. 춥고 얼어붙고 거칠어지는 시간을
굳이 맞받지 않고 온화한 봄이 오기까지 기다리려는 자연의 지혜인 듯하다.
그래서 채소요리를 주로 하는 사람들에게 겨울은 그다지 반갑지 않을 수 있다.
만날 수 있는 제철 채소의 가짓수가 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온갖 과실이 쏟아지는
가을의 식탁에 비하면 겨울의 식탁은 계절성이 희미해지고, 채소는 기운이 부족하고,
과일은 빛을 잃는다. 겨울이 오기 전 저장해놓았던 짠지며, 절임 같은 식재료들을 꺼내
한 상 차리는 게 그나마 겨울 제철 식탁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까.
겨울에는 거뭇하게 흙이 묻은 뿌리채소들을 주목해야 한다.
우엉, 연근, 토란, 당근, 이런 아이들이 땅에서 머금는 힘이 대단하다. 다만 뿌리채소들은
땅의 향이 진하게 배어있고 식감도 억세서 조화롭게 요리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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