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4 - 2024 공감그리고 여름 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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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왔다고 했다. 그렇게 기존에 그린 것을 흰색으로 다시 덮었다. 그의 말과
그림이 겹쳐 하나로 들리며 지난날 내가 모르던 시간들이 그려졌다. 우리는 천천히
오랫동안 같은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낮고 부드러운 D작가님의 음성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단단함이 느껴지고 편안하게 들려온다. 우리의 대화는
바깥으로 튕겨 나가지 않고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출판마케팅 강연을 듣기 위해 15분가량 걸었다. 곧 강연장에
가면 사람들로 붐빌 테고, 다음에도 예정된 만남이 여러 개였기에 짧게나마 혼자
걷는 시간이 더욱 소중했다. 앞으로 남은 일정에서 지치지 않게 에너지도 비축하고
앞서 본 전시회도 차근차근 곱씹었다. 강연은 두 시간 반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실무자의 출판마케팅 노하우에 저절로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멀리서 올라와
들을 만했다. 강연이 끝나고 연대모임을 하는 동료들과 함께 또 걸었다. 한 동료의
사무실에 도착해서 앞선 마케팅 교육에 관한 느낌, 현재 출판 시장에 관한 이야기,
곧 있을 도서전 행사에 대한 아이디어로 쉴 새 없이 얘기를 나눴다. 그러는 사이
나는 외출한지 거의 한나절이 다 되어갔고 사회적 에너지도 슬슬 고갈되려는 찰나,
마지막 만남으로 향했다.
Y와 H는 몇 해 전 글쓰기 모임에서 알게 된 동갑내기였다. 사는 지역이 달라 자주
보지 못했다. 우리는 직장과 사회생활의 애환, 요즘 일상을 지탱하는 취미 들로
회포를 풀었다. 전통주가 유명한 가게 안은 조명이 차분하게 내려앉아 한눈에도
꽤 고급진 분위기를 자아냈다. 혼자 일하는 사장님은 정성스레 만든 요리를 내어
올 때마다 친절하게 먹는 법을 설명해주었다. 동굴 같은 목소리가 좋기도 했지만
부산 말씨와 다른 조곤조곤함에 속으로 신기하게 느꼈다. 대화가 무르익을 즈음
친구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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