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2024 공감그리고 여름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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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배는 한참 아래인 듯한데 쓰는 말은 범상치가 않았다. 이를 방증하듯 작품은 힘차고 강렬했다. 허나
부드러웠다. 물음표였다가 느낌표였다. 물이었다가 불이었다. 하늘이었다, 바다였다, 노인이었다, 그러나
이내 아이로 보였다. 평평한 한지에 입체를 만들고 빛을 부리고 윤기를 내니 마치 코앞까지 뛰어오르는
싱싱한 숭어로 보였다가도 돌연히 무너져내릴 것 같은 허방 같은 신비가 있었다.
“왼손으로 썼습니다. 오른손은 자꾸 배운 걸 기억하더라고요.”
그 순간 내가 떠올린 건 나와 동고동락하고 있는 연필 선인장이었다. 좋은 작가로 쑥쑥 크라고 5년 전 지인이
선물한 연필 선인장은 그때만 해도 시집 한 권보다 키가 작은 아담한 사이즈였다. 그러나 지금은 허리 정도
되는 키로 불쑥 자라났는데 그 모양이 범상치가 않다. 녀석은 내게 한순간에 웃자란 줄기가 어떤 세상을
펼치고 만들어가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건 곧게 자란 수목형의 나무형태가 아닌 변종이자 변주이자
변화의 역동이었다. 녀석은 더는 연필의 곧은 형태가 아닌 연필 선인장이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이를 노마드(nomad)라 일컬을 수 있다. 경계 없이 뿌리로 뒤엉키고, 한곳에 정주하지
않으며, 틀 안에 갇히지 않으려는 새로운 발자국 말이다. 나는 내 방 한구석에서 들썩이며 자라나는 이 재즈
같은 식물에게서 자기만의 모습으로 살아가려 애쓰는 한 영혼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 같은 이들을 가리켜
시인이라 칭한다. 시인이다, 연필이 시인이다, 나무가 시인이다, 그가 시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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