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2024 공감그리고 여름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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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펼쳐낸 삶의 궤적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나 묘하게도 서예원의 홍보 문구가 내겐 더 간절하게
다가왔다. 심신안정, 정서순화, 감성자극, 꿀잠보장, 자존감상승. 그 단어 단어 사이에는 숲이 있고, 바다가
있고, 초원이 있고, 욕조가 있다. 요가 있고, 베개가 있고, 방석이 있고, 팔걸이가 있다. 맨발도 좋고, 민낯도
괜찮아, 밤이면 어떻고, 낮이면 어쩌랴, 하는 식. 나는 그의 이름을 꼭 쥐고 돌아왔다. 언젠가 그가 내 스승이
되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는 서예가 나아 가야 할 길을 몸소 투쟁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의 레지스탕스적인 마음에 빠져 이 가을에
걸맞은 단어를 하나 내어놓길 기대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습’을 마련했다.
습은 관습이나 습관의 관성이겠으나 습지의 기운이 있고 능하기 위한 수련의 과정이겠으며 매운맛을 감추는
소리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한 습은 붓을 거꾸로 세운 형상 그 자체다. 거꾸로 붓을 들어 먹이
손가락으로 떨어지고 흐르고 물들고 말라버리는 동안 나는 새로 온 가을을 마주하며 잠시 아프지 않을 것을
예감한다.
문득, 시인의 말에 수긍이 된다. 자국이다. 저기 저 설원 같은 한지 위에 선처럼 선 채로 자국을 남기는 그를
떠올려본다. 붓이 곧 사람이다. 한 사람이, 아니 두 사람이 흰 능선 위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고 있다.
오성은
소설가. 『라스팔마스는 없다』, 『되겠다는 마음』 등을 썼다. ohseonge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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