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3 - 2024 공감그리고 겨울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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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허공에 연필로 하트 모양 클로버 이파리를 그렸다. 행굴 씨가
가장 좋아하는 이파리라 그런지 행굴 씨는 나를 쫓다 말고 이파리를 먹기
시작했다. 행굴 씨가 이파리를 먹자 행굴 씨의 몸에 난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멍하니 행굴 씨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엄마가 나에게로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친구들도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투명한 벽은 어느새
사라진 듯했다. 이파리를 다 먹은 행굴 씨는 더는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나는 행굴 씨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행굴 씨가 슬쩍 발가락을
내밀었다. 말랑하고 축축한 발과 악수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행굴
씨에게서는 연필 냄새와 풀 냄새가 났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먼저 온 김승준과 연우가 어젯밤 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셋은 서로를 바라봤다. 나는 씩 웃었다. 만약 두 사람의 꿈을
물어뜯으려는 게 나온다면, 나도 그 꿈으로 가 옆에서 응원할 것이었다.
그런 건 우리의 꿈을 먹어 치울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자리에 앉아 또 행굴 씨를 그렸다. 행굴 씨의 연잎 위에 나도 함께 누운
그림을 그리자 시원하게 연잎 드라이브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뒷문으로
수정이가 들어왔다. 또 두꺼운 주식 어쩌고 책을 들고 바로 책상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발레복을 입고 다리를 쭉 뻗는 수정이를 그렸다.
수정이를 툭툭 치고 그림을 건넸는데, 수정이는 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난
너 유연한 거 멋있더라.” 내 말에 수정이가 수줍게 웃더니 그림을 받아서
꼬옥 쥐었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그림을 그렸다. 먹방 유튜버가 된
김승준, 선생님이 된 연우…. 그리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오늘따라 더 기분 좋게 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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