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2 - 2024 공감그리고 겨울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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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가 느린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아야!” 바보같이 내 발에 내가 걸려 무릎부터 세게 넘어져 버렸다. 꿈인
                 걸 아는데도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행굴 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행굴 씨는 내 필통을 빼앗으려 했다. 좀비 꿈을 꾸면 무조건 나를 물어뜯어
                 버린다는데, 왜 필통에 집착하는 거지? 나는 내 손에 있는 필통을 빤히 봤다.

                 필통을 열어 연필을 꺼내자 행굴 씨가 다급하게 발을 뻗었다. 영화에서
                 본 적 있다. 이럴 땐 이게 여기서 탈출할 열쇠다. 그런데 뭘 그려야 하지?

                 나는 개구리의 천적을 떠올렸다. 부엉이? 독수리? 그래, 뱀! 뱀은 빠르게

                 그릴 수 있고, 개구리를 잡아먹을 수 있다. 나는 후다닥 연필을 허공에 대고
                 뱀을 그렸다. 내 예상대로 뱀이 나타났다. 뱀은 쉭쉭거리며 행굴 씨에게

                 다가갔다. 뱀이 행굴 씨를 물 때마다 행굴 씨의 몸에 상처가 났다. 나에게
                 난 것과 비슷하게 움푹 파여서 구멍이 날 것 같은, 깊은 상처였다. 행굴 씨는

                 점점 작아졌다. 뱀이 행굴 씨를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행굴 씨와 내 눈이 마주쳤다. 행굴씨의 얼굴에도 할퀸 것 같은 상처가

                 가득했다.

                 “안 돼!” 나는 행굴 씨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내 뱀을 지워버렸다. 뒤를 돌아보니 행굴 씨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작은 행굴 씨가 나를 다시 쫓아 왔다. 행굴 씨가 계속 나를
                 할퀴었다. 나는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엄마와 친구들 쪽을 쳐다봤다.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내 손가락의 상처가 사라졌다.
                 다시 고개를 들어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 뺨의 상처가 사라졌다. 김승준과

                 눈이 마주치자 팔뚝의 상처가 사라졌다. 이젠 정말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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