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 - 2024 공감그리고 여름 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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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부박하고 촌스러운 상상력이지만, 당시엔 꽤 참신하지 않은가라는 뻔뻔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청소년들의 눈을 붙잡기 위해선 그런 장치라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옛날을 헤적이는 일이란, 창피를 무릅쓰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느낀다. 그렇다고 그 무렵의
                      나를 위한 변명조차 마련 못할쏘냐. ‘영어교사’, ‘작가’, ‘배우’, ‘연출가’, ‘작곡가’, ‘독립운동가’,
                      ‘군인’, ‘극장장’, ‘교수’…  믿기 어렵겠지만 한 사람이 입었던 직업들이다. ‘부산’과 ‘베이징’,
                      ‘상하이’, ‘시안’, ‘충칭’, ‘칭다오’… 한 사람이 누볐던 생의 무대이며, ‘김구’, ‘장제스’, ‘지청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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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범석 ’ 같은 당대 거인들과 항일의 한 길을 걸었던 선생에겐 ‘눌원문화상’,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같은 영예가 돌아갔다. 그런 선생의 생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타임슬립 같은
                      알량한 디딤목이라도 필요했던 것 아니냔 말이다.


                      유안이는 시공간을 오가며 청년 한형석의 말과 사고, 행동을 좇는다. 본시 작가란 겪은 것만
                      쓰는 자가 아님을 모르지 않지만, 시대의 아픔을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것이 어찌나 어렵고
                      죄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유안이가 필요했고, 그 방패 뒤에 숨어서 이런 문장들을 썼다.
                     ‘1953년, 극장 밖은 전쟁의 포연이 채 다 흩어지지 않은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아이들의 순수마저
                     죄 가리진 못하는 모양이다. 그 시절, 전쟁통에 부모 잃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고아들은…’
                      낯 두껍기도 해라.


                      개관이 미뤄진 극장 앞을 발밤발밤하다 서구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의 길과 장소들을 휘적휘적
                      걷는다. 졸지에 대도시 부산시민으로 거듭난 이들은 저마다 주어진 몫의 하루를 견디며 입에
                      풀칠을 했으리라. 나는 추체험의 한가운데에서 깊은 상흔 우에 딱지 얹은 무심한 세월에

                      잠겨들었다. 어제의 환난을 딛고 다다른 오늘, 어쩜 우린 그 시절, 옛날을 살아낸 모든 촌부들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 아닐까.
                      ‘빚’이라는 말을 떠올리자, 자연히 ‘상환’, ‘이자’ 같은 말들이 따라온다. 지극히 속된 의식의 흐름은
                      쉽사리 따돌려지지 않는다. 읽고 쓰는 삶을 택한 주제에 가정을 꾸리고 집을 소유하기 위해
                      버둥거려온 필자 개인의 삶에서 연유한 사고의 파편들일 것이다. 아파트 거주민인 나는 과연
                      시간이 정지된 곳의 달동네 풍경들과 아무런 연결점이 없는 걸까. 현재란 과거와 외따로 떨어져
                      그저 존재하는 것일까. ‘자유아동극장’, ‘임시수도 기념관’, ‘아미동 비석마을’ 골목을 구석구석





                      08  광복군 총사령관
                      09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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