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속 기록이 관계를 만들다
부산 중구 동광동의 인쇄 골목은 여전히 잉크 냄새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철제 인쇄기에서 흘러나오는 리듬과 종이를 고르는 손끝의 감각은, 오랜 세월을 지나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 인쇄는 이 골목의 노동이자 기술이었지만, 동시에 도시의 기억을 남기는 기록의 형식이었다. 신문의 활자, 학교의 교재, 전단 한 장까지, 이 골목에서 찍혀 나간 수많은 인쇄물은 시대의 공기와 사람들의 마음을 담고 있었다. 이제는 디지털 화면 속에서 문장이 완성되고, 인쇄소의 기계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그 사라짐의 자리에서 오히려 인쇄의 본질이 드러난다. 인쇄는 정보를 복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한 시대의 목소리를 손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순간, 그 흔적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이 된다.
인쇄 골목의 기록은 도시의 변화를 증언한다. 골목을 따라 늘어선 인쇄소 간판들은 한 세대의 노동과 꿈을 품고 있고, 종이 더미 속에는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여 있다. 인쇄된 문장은 함께 사는 사회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전한다. 그래서 인쇄는 한 사람에서 또 다른 사람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연결의 언어가 된다. 오늘의 인쇄 골목은 산업의 유산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이어주는 기억의 장소다. 낡은 기계와 오래된 활자는 여전히 움직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문장들이 찍혀 나온다. 그 문장들은 도시를 이야기하고, 사람을 기억하며, 세대를 잇는다. 인쇄의 기록은 단지 종이 위의 흔적이 아니라, 시간과 사람을 묶는 보이지 않는 관계의 실이다.
2025 예술인파견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진행된 〈인쇄 골목, 활자 속 이야기를 걷다〉 프로젝트는 예술과 지역 산업의 협업을 통해 점차 사라져가는 지역 인쇄 문화를 기록하고, 예술적 아카이빙으로 지역의 기억과 공동체의 가치를 확장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