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언어가 기록으로 이어지다
예술의 시간은 언제나 짧다. 전시가 끝나면 조명이 꺼지고, 무대가 닫히면 관객의 발걸음은 흩어진다. 그러나 예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 ‘기록’이 남는다. 기록은 과거의 흔적을 붙잡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예술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을 마련하는 창조적 행위다. 그리고 그 기록이 쌓여 예술의 생태계가 형성된다.
문화단체 <부산,머물다>의 머물다 시리즈 6권인 『영도, 머물다 – 디아스포라』는 바로 그 기록의 힘을 보여주는 책이다. 부산 영도를 무대로, 여러 예술가가 바라본 지역의 풍경과 기억을 모아 엮은 이 책은 ‘예술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작업은 특정 작가의 개인적인 산문집이 아니라, 지역의 예술가들이 함께 만든 집단적 아카이빙의 형태를 띠고 있다. 각자의 시선이 모여 하나의 서사를 이루며, 예술적 기록이 곧 지역의 사회문화적 기록으로 확장되는 사례다.
책 속의 영도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바다와 항만, 언덕과 골목, 그리고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기억의 지층이다. 예술가들은 이 도시의 변두리에서 잊히거나 사라져가는 장면을 붙잡고, 그 풍경을 언어와 이미지로 기록한다. 사진, 글, 드로잉, 지도, 인터뷰, 음식의 기록까지 — 책은 한 도시의 ‘감각적 아카이브’로 완성된다. 인쇄소의 활자 냄새와 낡은 제본의 질감 속에는, 지역 예술가들의 손끝에서 비롯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책은 오로지 종이 위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바로 그 물성 때문에, 이 기록은 더욱 강한 실재감을 지닌다. 책을 펼치는 행위는 곧 지역의 시간과 예술가의 감각을 손끝으로 읽는 경험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도시의 공기, 사람의 숨결, 예술가의 시선이 함께 느껴진다. 이것은 디지털 아카이브가 제공하지 못하는 ‘느린 기록’의 가치이다. 종이책은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예술가와 독자, 지역이 다시 만나게 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책은 예술가의 창작과 지역의 기억을 연결하는 하나의 물리적 다리이며, 그 다리 위를 건너는 모든 이들은 곧 새로운 기록의 주체가 된다.
이처럼 예술 기록의 가치는 기록의 형태에 있지 않다. 그것은 ‘기록을 통해 무엇이 이어지는가’에 있다. 기록은 과거의 완결이 아니라 미래의 예고이며, 한 권의 책이 지역 예술의 아카이브가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속에 ‘다음 이야기를 향한 여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