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2024 공감그리고 겨울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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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누구보다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잘 내뱉지 않는, 기후 위기, 인권, 동물권, 생태계 같은 단어들을 쓰면서
지구와 삶을 지키기 위해 작은 행동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 나에게 격려와
환호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상치 못한 환대의 분위기에, 들끓는 에너지에 꽤 심취해
있었다. 기후 위기를 말하고, 공부하고, 글 쓰고, 친구들과 시위, 캠페인, 전시, 프로그램을 만들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나. 관계 맺고 표현하는 데 실수도 잦았지만 두 눈을 반짝이며 듣고,
개선하고, 성장하려고 애썼던 나는 지금 생각해도 멋있다. 한편으론 질투도 난다. 지금 나는
아주 심각하게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데, 사진 속 나는 얄미울 만큼 상쾌하게 웃고 있다.
스물일곱을 앞둔 요즘, 자주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들 바쁘게 좋은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데 혼자 안일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친했던 사람도, 좋아했던 사람도 멀게 느껴진다. 유복해 보이는 삶에도 분명 지옥 같은 순간이
있을 텐데, 나는 우물 위만 볼 수 있는 개구리라서 쉽게 억울해진다.
스물다섯까지는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뜻을 따라 살자고, 그 이후로는 번듯한 직장도 갖고,
부모님 호강시켜 주자고 다짐했는데 목표와 멀어져 있단 걸 자각할 때마다 식은땀이 흐른다.
전공인 공학과 멀어지고, 문화예술과 교육에 가까워진 나. 그렇지만 환경 운동가도, 기획자도,
디자이너도, 예술가도 아닌 어정쩡한 정체성. 부유하는 내 영혼이 뿌리내릴 곳은 어디일까.
하늘을 개척할 가지가 될지, 빛을 모으는 잎이 될지, 세상으로 퍼져갈 꽃이 될지 모른 채
02
봄을 기다리는 겨울눈 신세는 이제 탈출하고 싶다. 고민으로 뭉친 어깨와, 뻐근한 목덜미,
찌릿한 꼬리뼈를 달래며 집으로 가는 길, 유독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사이에 피어난 작은 풀이
선명하게 보인다. 흙 한 줌을 집 삼아 잠깐 내린 비로 목 축이고, 욕심 없이 자란 풀. 내 영혼도
저 풀처럼 작은 자리에도 만족하고 피어나면 좋겠다. 상상 속에서 엄마가 속삭여준 말처럼
어떤 삶이든 그저 생생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여름 이불 같은 불안은 걷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카페 안을 돌아다니던 그 아이처럼.
02 에수목이나 다년생 초본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겨울을 지내기 위해 만드는 눈으로, 봄에 새싹이 나올 수 있도록
겨울내내 보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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