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2024 공감그리고 봄 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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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들어와 주류 자본 문화에 저항하는 하위문화라는 의미와 그마저도 중산층의 소비문화라는 비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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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에 받고 있다.  나는 단 한번도 힙스터인 적이 없었지만(힙스터의 전제 조건 1. 자신이 힙스터임을
             부정해야 한다) 힙에 대해 떠올리는 동안 견디기 힘든 요통을 앓았다. 이 같은 우연을 필연적인 합리화로 겸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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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소설가로 살아가는 일이 그 자체로 신선한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고, 요통이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육체노동이라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의 시선은

             (앞 문단에서 기술했다시피) 욕망이 (들끓고)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고 있다. 내게는 사실 최신의 경향(hip)에
             대한 동경은 없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한 감각에의 성찰이, 아니 성찰을
             욕망하는 어떠한 감각이 낯선 마찰을 빚고 있고, 나는 그걸 힙이라 부르고 싶다. 실상 힙은 직립 뒤에 숨은 위대한

             신체 부위도, 주류에 대한 저항 의식의 또 다른 이름도, 히피(hippie)나 힙합(hiphop)에 대한 어원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음성적 기호도, 중산층의 놀이도구로 전락한 모순을 가진 딜레마도 아니다. 그저 힙은 우리가
             굴려내는 혀끝에서 공명한 일종의 소통이다. 힙. 나는 그것이 나의 단어라고는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관통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의 흥미를 느낀다. 우리는 모두 저 단어를 통과하여 작품 한 점과
             마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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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희정의 <걸어간다> 는 걸어갔다와 걸어갈 것이다 사이에 있는 현현(epiphany)이다. 무엇으로도 상쇄할 수
             없는 대상의 출현이 이 봄에 있어 반갑고 고맙다. 돌이켜 보면, 처음 그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내 마음이 기운
             까닭은 돌출하는 색감과 구조적 유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할머니 때문인 것 같다. 내 할머니의 허리

             굽음과 할머니와 나의 추억 굽음과 내 할머니의 주름 굽음과 내 어머니가 당신의 어머니를 떠올릴 때의 미소
             굽음과 할머니 집 앞 돌담길의 굽음과 떠나기 전 마지막 모습, 그러나 작품 속 그리 굽어 있지 않은 인물들에게서
             찾아낸 굽음과 굽음 없음의 마찰이 평면도가 아닌 입체로 살아와 당혹을 전해주었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꼿꼿한 직립으로, 상하좌우로 이동하면서 동시에 캔버스 밖으로 튀어 나가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는 것만 같다.
             아니, 이미 바깥의 일상적 풍경이 그림 안으로 들어갔으니 되돌아 나온다고 해야 할까. 나는 거기에서 어떤
             욕망이나 욕망의 시선이나 진화적 욕망이나 욕망의 진화를 엿볼 수가 없다. 오직 거기에는 소실되었거나,
             소실되지 않은 어떤 상흔이 해맑게 새겨져 있을 뿐이다. 벚꽃보다 좋은 그림이다. 흐트러지면서도 투명하게도

             걸어가는 작은 공명을 오늘의 힙으로 명명하여, 이젠 만날 수 없는 나의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다.



             할머니여. 아, 이 힙한 인류여.




                                                오성은
                           소설가. 『라스팔마스는 없다』, 『되겠다는 마음』 등을 썼다. OHSEONGE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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