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 - 2024 공감그리고 봄 52호
P. 16
부산항과 신포항 사이에서 일어난 밀수 혹은 밀무역은 냉전 체제라는 강력한 교류
금지의 장막에도 불구하고 남북 사이에 비가시화되어 있었던 일종의 ‘교류’의 한
방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패했으나, 다른 밀수꾼들은 성공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까 말이다(밀수는 ‘검거’되어야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본적지가 모두 다른 이 세 명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가 무더운 더위를 무릅쓰고 우리집에 보내 준 명란은 원산에 있는 H수산회사의
대냉동창고 처음으로 냉장 시험차 전해 12월에 집어 넣어 두었던 것인데 너무도
풍미가 좋아 회사 안에서만 먹을 수가 없어 한통을 보내준 그야말로 여름 더운
때에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진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 사실 그 뒤 몇 해를
두고 여름만 오면 그처럼 냉장하였던 명란젓을 찾아 보았으나 발견할 수가 없었다.
부산 피난 당시에도 찾아 보았으나 구하지를 못하여 단념하고 말았는데 꼭 한번
만이라도 좋으니 무더운 여름날에 그것으로서 식히 맥주를 맛보는 기회가 와
주었으면 좋겠다. [단기]4290[1957년]”
- 윤고종, 『명란젓』, 『쑥꽃 사어록』, 범조사, 1959. 221~222쪽. []은 인용자)
한편 윤고종이 이 글을 썼을 때는 부산 영도에 있던 피난민이 대거 속초로 이주를 했을
무렵이다. 실제로 속초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 중인 자료 가운데 영도 풍경과 국제시장
대화재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이 시기의 부산에 관련된 서사와 이미지는 부산 내부에만 있는 것일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영도 피난민들이 속초로 대거 이주하게 되면서,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중단되어 있던 명태잡이가 속초에서 다시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해방과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십여년의 기간 동안 후쿠오카에서는 부산의
‘맛’으로 기억하고 있던 명란젓을 카와하라 도시오가 ‘카라시멘타이코’로 재발명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