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장희창
뒷산 골짜기로 아침 산책을 자주 간다. 불어오는 바람 소리, 흘러가는 물소리는 언제 들어도 시원하다. 이게 뭐야. 내 머릿속 잡념도 끊임이 없네. 잡념이 이기나, 물소리가 이기나. 이런, 내가 일방적으로 밀린다. 우리의 삶이란 무승부의 세계일 것임이 분명한데 나는 왜 이리 허둥대는가. 이따금 곤줄박이와 직박구리, 다람쥐와 멧비둘기가 등장한다. 아주 가끔 왜가리도 보인다.
나는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천하의 누구누구’라고 부르곤 한다. 가령 아틀리에에서 거리에서 예술에 몸 바치는 화가나 춤꾼들을 어쩌다가 만나면 천하의 예술가를 만나 반갑다며 호들갑 떤다. 상대방은 잠시 어리둥절하겠지만, 내 말은 과찬도 호들갑도 아니고 엄연한 현실이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이 광대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당신. 물신(物神)의 안개 자욱한 우중충한 거리에 파릇파릇 싹을 틔우는 분들이 아닌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새로 부임해 온 키팅 선생은 세상과의 교감을 잃어가며, 균일한 인간으로 훈육되어 가는 학생들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말했던가. “카르페 디엠! 순간을 잡아라!”는 그의 말에 공감한 학생들이 야간모임에서 바이블처럼 읽었던 책은 『월든』이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은 살아 있고 또 끊임없이 변해간다. 꾸물거릴 틈이 어딨나. 바로 지금 행복해지지 않으면 언제 행복해질래. 자연과 사회 속에 기적처럼 던져진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고, 친구들과 그 설렘과 행복을 쟁취하라는 것이 키팅 선생의 가르침이었다.
지구로 온 어린왕자가 친구를 기다리며 느꼈던 설렘과 두근거림은 우정이 움트는 소리였다. 그 설렘은 무지와 탐욕의 벽을 뚫고 이웃에게로 다가가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월든 호숫가에서 오두막을 지어놓고 살았던 소로는 이렇게 말한다. “선(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죽은 숲에서 새싹이 돋는 것과 같다.” 자연과 인간 사회는 이런 식으로 손잡고 있다. 『월든』은 어디를 펼쳐도 싱그러운 야생의 기운이 넘실거린다. “큰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나의 재주!”와 같은 역설적 표현들이 가득하다. ‘큰 것’ 속에 담긴 부정의 의미를 다시 부정하며, 그 전체를 긍정하는 소용돌이치는 어법이다. 자연의 꿈틀거림이 몸속에 그대로 배어든 그런 표현이다. 사상의 대가는 곧 표현의 대가이다.
자연만 살아 있는가. 역사도 살아 있다. 지난 몇 달 동안에도 코앞에서 보았듯이 역사는 엎치락뒤치락, 안도와 울분. 때로는 희망이고 때로는 절망이다. E. H. 카는 역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가 다루는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다. 유토피아는 저 먼 곳에 있는 어떤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이정표들은 우리가 한 발 한 발 전진해야만 시야에 들어온다. 역사의 소리 없는 함성은 5월의 광주로부터,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미래로부터 동시에 들려온다. 루쉰의 말대로 희망이란 길과 같은 것이다. 길이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다니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묵묵한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시장 체제 안에서 성장하는 것 같지만 실은 쪼그라들고 순종하고 표준화된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활달한 개성과 독창성을 가꾸어가는 시민들의 발랄함이 우리를 살맛 나게 한다. 인간보다 인간에게 이로운 건 없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질지도 모르는 위기의 시대, 인간의 인간됨을 묻는 것은 우리 시대의 긴요한 화두이다. 기계에, 인공지능에 무슨 그리움이 있고 설렘이 있을 것이며, 인공지능이 어떻게 싹을 틔우겠는가.
나의 유토피아는 자유와 웃음의 정신이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머물지 말고, 정착하지 말고 유목민으로 살며, 익숙함과 낯설음을 평등하게 보라고 말한다. 공자 왈 맹자 왈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민중의 삶과 고통 속으로 내려오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엄숙하기보다는 장난스럽다. 시종일관 웃음의 물결이 출렁거린다. 양반들의 위선을 고발할 때는 차가운 풍자의 웃음을, 백성 앞에서는 따뜻한 해학을 날린다. 장난기는 무거움을 털어버리고 중심을 해체한다. 과거 시험장에 억지로 끌려왔다가 답안지에 낙서를 해놓고 뺑소니친 장면은 한국사의 명장면이다. 지금의 고시 과목에 연암의 『열하일기』는 꼭 넣어야 한다.
스페인에서 웃음의 대가는 세르반테스다. 알제리 해적들에게 붙들려 5년간 갤리선에서 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달관의 인간 세르반테스. 그의 분신인 돈키호테는 스페인의 광활한 평원을 떠돌며 귀족도 평민도 공주도 술집 여성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평등함을 설파한다. 광기에 찬 인물로 알려진 돈키호테는 알고 보면 도통한 인간이다. 술집 여성을 보고 공주라고 그랬으니 진짜 공주는 얼마나 분통 터졌을까. 하지만 서민들이야 환호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돈키호테에겐 일말의 권위 의식도 없다. 세숫대야를 투구로 쓰고 다니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거침없는 명랑함.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풍자와 조롱의 몸짓이다.
『돈키호테』를 읽으면 배후에서 씽긋 웃는 역전의 용사 세르반테스를 만난다. 그가 한마디 툭 던진다. 정의와 자비가 부딪칠 때는 그래도 자비를 택하도록 하시오. 『파우스트』를 넘기면 바이마르 시내를 유유히 걸어가는 지혜와 관용의 인간 괴테를 만난다. 그가 말한다. 모든 이론은 잿빛이고 생명의 황금 나무는 영원히 푸른 거네. 집중해 읽노라면 대가들의 굽이치며 흘러가는 정신의 물결 한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상 수상 소감으로 “하늘에 있는 선배님들께 감사드린다”고 한 것도 나는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그는 어리지 않느냐고? 천만에. 예술가도 현자도 영원히 젊다. 싱싱한 표현들은 그들의 영원한 젊음으로부터 온 것이다.
아무리 코너에 몰려 있어도 웃을 줄 아는 인간! 상식의 감옥을 순식간에 벗어나는 경쾌한 걸음. 자기 운명을 자기가 장악하고 있는 분들의 무덤덤한 시선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나의 꼴은 꾀죄죄하지만, 이들의 영혼을 만나면 덩달아 기분 좋아진다. 그 리듬을 따라가노라면 굴곡진 세상사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는 쾌감이 든다.
봄이란 무엇인가. 어둠 속에 움츠리고 있다가 빛의 세상을 보러 나오는 싹들의 외출이 아닌가. 장자가 그러셨지. 여물위춘(與物爲春). 만물과 더불어 봄을 이룬다. 자자, 봄맞이 갑시다.
장희창
번역가, 작가, 전 동의대 교수, 괴테학회회장 역임, 현재 독일 고전문학 연구과 번역에 종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