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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포도알 삼키기

조재윤

나를 뒤따라 나온 그가 웃는 얼굴로 손바닥을 펼쳐보였을 때,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손금을 짓누르고 있는 동그란 포도 한 알을 보았을 때 나는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했다. 나는 그가 내민 포도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이빨로 껍질을 벗겨내자 과즙이 입 안에 퍼졌다. 이빨로 포도를 씹으려고 할 때 그가 말을 걸었다.
맛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실수로 껍질과 포도알을 삼켜버렸다. 끄덕과 꿀꺽은 함께 일어났고 나는 목을 타고 넘어가는 포도알을 상상했다. 동그란 과육과 그 속에 심겨져 있는 씨앗은 온전한 상태로 텅 빈 위장에 톡, 하고 떨어졌다. 그가 싱긋 웃으며 내 어깨를 톡 두드리며 다행이에요, 말한 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떤 게 다행인지 몰라서 회사 정문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의 등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는데 그때서야 나는 그가 나와 같은 부서였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그의 이름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정오의 햇빛을 받으며 걸었다. 회사에서 집은 멀지 않았다. 신호등을 세 개 건너면 원룸이 나왔다. 결국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했다. 회사에서 둥둥 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뭉게뭉게 떠 있는 연기처럼 지내다가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회사에 있는 동안 세 개의 신호등 중 어느 곳이든 서 있는 나를 상상을 했다. 도로의 바깥이든, 안이든 좋다고 생각하며. 회사를 그렇게 쉽게 때려치우면 무얼 해먹고 살 수 있겠냐는 엄마의 잔소리가 귓가에 잔상처럼 퍼질 줄 알았는데 들려온 건 뜻밖의 말이었다.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는 목소리가 엄마의 뒤에서 익살스럽게 말했다.
야, 니 씨 삼켰나. 니 이제 배에서 포도나무 자란디.
빨간불. 첫 번째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내가 포도를 먹을 때면 말하던 사람. 엄마의 뒤에서 말하는 사람은 외삼촌이었다. 그러고 보니 포도를 씹지 않고 그대로 꿀꺽 삼킨 게 얼마만인지. 초록불. 나는 발을 뻗으며 생각했다. 그땐 청포도였던 것 같은데. 신호를 다 건널 때 즈음부터 동그란 과육이 뱃속을 뒹굴거리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 신호등은 아주 길었다. 양 옆으로 사람들이 서기 시작했다. 이십 년 정도 삼촌을 잊고 살았다. 삼촌에 대해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 회사 그만뒀어 라는 말은 괄호 안에 숨겨둔 채 외삼촌은 요즘 어떻게 사냐고 물었다. 삼촌은 엄마의 동생이었으니까 당연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었다. 신호등은 계속해서 빨간불이었다. 엄마는 나의 질문에 왜? 라고 답했다. 회사에 있을 시간인 딸이 정오에 뜬금없이 오랫동안 왕래가 없던 삼촌의 소식을 궁금해 할 확률 같은 건 엄마가 생각하지 않길 바랐다. 다행히 엄마는 추궁 대신 느그 삼촌, 이라고 운을 뗐다.
니 초등학교 드가기 전에 죽었다이가. 기억 안나나.
빨간불. 아니, 5초 전부터 파란불인 신호등엔 나만 남아 있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적당한 온기의 바람이 불었다. 회사에서 집이 멀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바닥을 보며 걷던 출근길과 달리 이른 퇴근길은 멀었다. 꽃잎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아침에도 꽃이 피어 있었나. 하루하루 미뤄뒀던 봄이 어느새 빨간불로 변해버린 신호등 앞에 도착해 있었다. 다시, 다시 두 번째 신호등.

삼촌의 그 말을 듣고서 아마 나는 울었을 것이다. 내 배에서 싹이 자라고 가지와 줄기가 온 몸을 채우고 포도송이가 와글거리게 될 것이라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런 나를 보며 삼촌은 껄껄 웃었을 것이다. 나는 삼촌에게 이제 나는 어떻게 하냐고 물었을 것이다. 삼촌은 나를 꼭 껴안으며 또 껄껄 웃으며 말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너의 몸에서 자란 포도는 아주 맛있을 거라고. 삼촌의 배에도 똑같은 포도나무가 있다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시, 초록불. 엄마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삼촌이 생각났느냐고 물었다. 나는 포도 때문이라고 답하려다 삼촌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었다. 엄마는 숨을 몇 번 들이키더니 답했다.
갸는 뭐 지가 하고 싶은 대로 살다 갔지. 나쁜 놈의 자슥.
어른처럼 보였던 삼촌은 지금의 나와 비슷한 고작 서른 남짓이었을 것이다.

세 번째 신호등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나와 같은 부서이지만 이름은 모르는 그가 누구인지. 초록불로 변했음에도 건너지 않는 나를 누군가 바라보았다. 유모차에 늙은 말티즈 한 마리를 태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유모차를 밀며 말했다. 잘 갑시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뭉게뭉게 떠 있던 나에게 매일 인사를 건넨 유일한 사람이었다.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포도알을 입에 넣었을 때처럼, 끄덕끄덕. 그의 손바닥에 놓인 포도알은 빨간불이 아닌 초록불임에도 신호등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에게 건네는 말 같았다.
세 번째 신호등을 건너고 뒤를 돌아봤을 때 배에서 뒹굴거리던 과육이 꿈틀거리며 생동했다. 씨앗 사이에서 파릇한 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분명히 맛있는 포도겠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재윤

1995년 식목일에 태어났다. 소심하고 사소한 편이다.
소소하고 사소한 이야기가 소설에 담기길 바라며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