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을 때까지 여기서 못나간다”
김광자 할머니는 동네 터줏대감 중의 한 분이다. 가덕도 외양포 마을에서 토박이 아닌 분이 없지만, 바닷가 마을 사람들 특유의 걸걸한 성격에 연세까지 많아 대다수 할머니의 맏언니 노릇을 하는 편이다. 몸도 특별히 불편한 곳이 없어 동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지난밤 별일이 없었는지, 무엇이 달라졌는지 확인하고는 출근하듯이 대항마을 넘어가는 옛길 끝에 있는 경로당에 간다. 점심때가 가까워지면 한 분, 두 분 마을의 할머니들이 이곳으로 모여 함께 점심을 드신다. 설거지를 마친 뒤 소일거리 삼아 화투로 시간을 보내면서, 마을의 대소사부터 시시콜콜한 저녁 밥상 차림까지 대화의 삼매경에 빠진다. 오늘은 문태네가 허리가 아파 명지에 있는 병원을 갔다던데, 수야 집 작은 손자는 지난주 서울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다던데, 이렇게 마을의 온갖 일들이 경로당을 중심으로 할머니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문태네, 수야네 할 것 없이 모든 집의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로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왔다. 그 시간이 올해로 80년이 되었다.
작년, 어느 이른 봄날 할머니들이 계신 마을 경로당을 찾았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분위기가 심상찮다. 한숨 소리와 함께 김광자 할머니의 걸걸한 목소리가 한층 톤이 높다. 평소와는 달리 격앙된 상황이란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할머니들의 한마디씩 내뱉듯이 하시는 말씀을 꿰맞추니 전후 상황이 그려졌다. 오전에 시청 공무원들이 왔다는 것이다. 2023년 말 국토부에서 가덕도 신공항을 국책사업으로 고시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설마’라는 심정으로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덜컥 물건 조사를 나온 것이다. 80년을 평화롭게 살아왔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고, 아니 준비할 새도 없이 내가 살던 집에서 쫓겨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할머니들의 신공항 사업에 대한 성토는 순서를 바꿔가며 계속되었다. 공항의 유무는 문제가 아니라 사는 곳에서 쫓겨나게 된 것에 화를 삭이지를 못하였다. 무거운 분위기에 어쩔 줄을 모르고 추임새처럼 할머님들의 말에 동의만 하다 엉거주춤 나오는데, ‘내가 이 나이 들어서 어딜 갈 꺼고’, ‘나는 여기서 죽을 끼다’, ‘나는 죽을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간다’라는 할머니들의 말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경로당 밖 멀리까지 들려왔다.
가덕도는 행정구역상 부산시에 속하는 섬이다. 부산이라고는 하지만 그곳을 가본 사람들이 많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섬마을이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가덕도가 일순간 신공항사업으로 혼란에 빠졌다. 가덕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연대봉 남쪽 아래, 대항, 세바지, 외양포 세 마을이 사라지고 남쪽 바다 위로 솟아있는 국수봉과 남산이 깎여나갈 예정이다. 그곳에는 ‘백 년 숲’이라 불리는 울창한 숲이 있다. 해풍을 맞은 아름드리 참나무가 굳건히 서 있고 동백 군락이 하늘을 덮었다. 이 숲은 이름처럼 백여 년의 시간 동안 사람들의 손길을 거의 타지 않은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일본군이 외양포 마을의 주민을 쫓아내고 요새를 구축하면서 일반인의 접근을 불허한 탓이다. 그런 까닭에 가덕도 남단의 국수봉 주위로는 자연과 생태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높은 봉우리에는 2차 대전 미군의 공습을 대비하던 관측소가 있고 관측소까지 올라가는 길은 군마가 다녔던 길이다. 후미진 짙은 숲속에는 참호가 있고, 막다른 길에는 탄약고가 있다. 동쪽과 서쪽의 아름다운 해안의 절벽에는 마을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만든 깊고 긴 인공 동굴도 있다. 모든 것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군국주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사라지는 세 개의 마을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외양포에 들어서면 시간이 멈춰진 듯하다. 마을을 수호하듯 펼쳐져 있는 포진지는 풀로 덮여 있는 탄약고와 둥글게 파여 있는 포 터가 그 형태와 규모를 짐작게 한다. 포진지 아래의 마을은 광복 이후 지금의 주민들이 터를 잡아, 1904년 일본군들이 진지를 구축한 그 모습 그대로 살고 있다. 더러 낡고 오래된 지붕을 고치고 실내를 꾸몄지만, 일본식 기와, 양철로 된 벽, 비늘 판벽, 눈썹지붕, 우물 등 전형적인 적산가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외양포 마을에서 일본군이 퇴각한 지 80년이 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오래된 집은 과거 일본군 병사들이 사용하였던 집이다. 지금도 마을 입구 안내 표지판에는 헌병대, 막사, 사령관실, 마구간 등 당시에 사용하였던 건물의 용도가 설명되어 있다. 마을 한쪽에는 우물도 있고, 목욕탕도 있고 공중화장실도 있다. 누구는 사령부 행정실이 자신의 집이 되고, 어떤 이는 쇠를 다루던 대장간 집의 주인이 되었다. 포진지 탄약고에 살았던 가족도 있다. 일본군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장소에서, 그들은 해방 후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총, 칼을 들고 식민 지배를 위해, 또는 일본 제국의 영광과 번영을 위해 몸 바쳤던 일본군 병사들의 흔적이 남은 곳에, 외딴섬 평범한 사람들의 지난한 삶이 하나의 공간에서 중첩된다. 일본군이 요새를 축성하고 40여 년의 시간, 그 자리에 지금의 주민이 80여 년의 시간, 도합 120년이란 긴 시간을 견뎌온 낡은 집은 아픈 우리의 역사와 평범한 변두리 삶의 기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기억들도 가덕도 신공항 공사가 시작되면 이곳 사람들과 함께 사라질 예정이다.
김광자 할머니는 여섯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이 마을로 왔다. 그때의 기억을 물었다. 공항 공사가 시작되면 이곳 사람들과 함께 사라질 예정이다.
이사 올 때는 고마 집들도 깨끗하이 새집이 다 돼가지고,
전부 다다미 깔려가꼬,
일본 사람은 다다미에 살았으니까.
전부 다다미 다 깔려있었지, 사람 사는 데는.
복판에 네 집 다섯 집이 여기가 걔네들 숙소라,
그래서 다다미가 딱 깔려 있고,
대장들 사는 집은, 요 앞에 있지요.
바로 밑에 요 집, 요 집이고,
저쪽에 또 기와집 하나 있지요.
거게는 그 밑에 대장이 살았는갑데.
그래서 거게는 화장실이 쪼끔씩 있더라고,
안에, 두 집은 안에 화장실이,
나머지는 이런 밥 하는 데고.
부속 재는 데고, 창고고 뭐고, 화약 재는 데고.
‘우찌 그리 잘 아노?’ (다른 할머니)
대충대충, 여섯 살에 왔으니까 상세히는 모르제.
앞에 집도, 원 집은 거가 밥 간이라.
불난 집, 지금은 없지, 불난 집,
그 집이 불이 안 났으면 이층으로 요래 돼 있었어.
짐 나가게끔 이층으로 요래 돼 있었는데,
불이 나는 바람에, 그래서 저기가 밥 간 새미라.
이 동네에 여덟 갠가 우물이 있거든요.
저것만 묵는 기라, 저 물만.
이상하지예, 옆에도 있는데 딱 저 물만 좋은기라, 저 우물만.
냄새도 안 나고, 찹고, 겨울 되면 뜨시고,
여름 되면 엄청 차워서 그 물이, 온 동네 질러다가 묵고 이랬다.
희한하제, 희한해.
칠월 칠석 되면 청소하고 약 넣고,
수도 안 나왔을 때는 그 물 묵고 살았다, 아입니까?
아이고 그때는 진짜 진짜 좋았다,
우리 엄마 말마따나 “좋은 기 천지로 다 있고,”
“좋은 기 다 있고 천지고,”
내도 따라가 보니 좋은 기 천지고.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퍼진다)
지난달 견학차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을을 찾았다. 3월 초까지 추운 날씨였다가 갑자기 날이 풀리면서 봄꽃들이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트렸다. 온 마을이 꽃동산이다. 꽃향기에 취해 마을을 둘러보는데, 우물 옆 작은 텃밭에서 수건을 두른 할머니가 밭일하고 계셨다. ‘파 한 단만 사주이소’라는 말에 ‘네?’ 하고 쳐다보니 김광자 할머니다. 할머니도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하신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일행들에게 반강제적으로 파를 안겼다. 할머니는 미안해하시면서 계속 파를 뽑아 더 넣어주신다. 키가 작고 뿌리가 통통한 것이 맛있는 파라면서.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우물가 한쪽에 절정으로 핀 동백이 붉은 꽃송이를 툭 툭 떨어트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