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그리고
지난호 보기
앎 ②

열매와 초록의 계절

이진아

계절의 변화는 언제나 새롭다.

긴 겨울이 지나고 어느새 봄인가 싶더니, 또 금방 여름이 찾아온다. 어릴 적에는 6월에도 아직은 봄의 느낌이 남아 있었고, 여름은 분명 7월쯤 되어야 실감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6월도 아닌 5월부터 한여름 더위를 느끼게 된다. 이제는 6월이면 진짜 확실한 여름이다. 빨리 받아들여야지. 특히 작년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그렇다면 여름이면 무엇이 떠오를까?

수박과 참외 같은 여름 과일도 생각나고, 휴양지와 자연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어디서나 에어컨과 아이스크림만 찾게 된다. 무더운 여름 이전의 시간이 자꾸 그리워진다. 바쁜 일상 속에서 해마다 4월 초에 잠깐 피는 벚꽃이 소중해서, 때를 놓치지 않고 보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그런데 작년, 재작년부터는 며칠간의 벚꽃보다는 이후에 점점 짙어지는 초록색의 나무와 숲이 훨씬 안정감 있고 든든하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열흘도 가지 못해서 화려한 꽃이 진다는 사실을 미리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으니 서운해할 것이 없다. 그리고 더 생생하고 싱그러운 초록의 계절이 온다. 아마도 이런 마음과 태도였나 보다.

여름에도 우리의 일상과 노동은 계속 이어진다.

요즘 뉴스를 보면, 기후 위기의 시대라고 한다. 해마다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 폭설 등등이 사람들의 예상치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재난과 재해도 많아진다. 최고 기록은 점점 경신되고, 거대한 변화에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고 힘들어한다. 그런데 기후의 불확실성 앞에서 인간이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미리 준비할 자원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슨 특별한 대책이 있나?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무더운 여름에도 그저 하루하루 땀 흘려 노동하고 먹고 자고 쉬면서, 무사히 여름이 지나가기를 그리고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이하는 날들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매일의 땀이 노동이고 생존인 사람들이 있다.

이른 아침 출근하다 보면, 아침부터 리어카에 폐지를 가득 담고 쌓아서 거리와 도로를 활보하는 분들을 마주치게 되기도 한다. 대부분 노령층이다. 그분들의 체구보다 높게 쌓인 폐지의 무게를 잘 모르겠다. 단지 물질적으로만 계산하기는 어렵고 부끄럽다.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앞에서 끌고 가는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지는 폐지 더미가 너무 거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계급에 따라서 다르게 체감되는 계절의 변화와 삶의 무게 앞에서,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뜨개질로 만든 수세미와 행운을 가져다주는 네잎클로버.

그런데 노년층과 빈곤을 단순하게 등치시킨다든지, 육체노동자를 복지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 역시 인간에 대한 완전한 이해라고 하기는 어렵다. 어느 날 뉴스에서, 뜨개질로 수세미를 만드는 할머니와 행운의 네잎클로버를 선사하는 할아버지의 사연을 접한 기억이 있다. 의정부의 할머니가 어느 고정된 장소에서 바늘로 한 땀씩 떠서 만드신 수세미는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다고 한다. 똑같은 모양이 없는 것이 바로 인기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각종 동물 모양과 독특한 형태까지 다양한데, 할머니는 그때그때 계절이 바뀌면 ‘신상 수세미’까지 보여주신다. 서울의 홍대 부근에서는, 요즘 보기 힘든 네잎클로버를 코팅해서 파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할머니와 다르게 고정된 장소에 계시지 않아서, 젊은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는 마주치는 것 자체가 행운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이들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정감과 함께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라고 소개되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땀의 가치란 무엇일까?

SNS에서 회자되는 ‘수세미 할머니’와 ‘네잎클로버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땀의 가치를 몸소 보여주는 분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바빠서 잊고 있었던 평범한 사실과 진리를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나 사는 것이 만만치는 않지만, 나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내 손에 달려 있고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것 말이다. 요즘엔 채널이 많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백세시대를 사는 어른들의 존재는 무궁무진하다.

해가 갈수록 여름이 덥다고 해도 나만 더운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 여름에는 덥다 덥다 푸념만 하지는 말고, 작고 평범한 루틴을 새로 만들고 실천하면 어떨까, 다짐해 본다. 물론 누구에게나 쉽지는 않다. 꾸준하게 이어가기도 힘들다. 그래도 조금 움직여 보자. 꾹 참고 3개월만 실천해 보자. 새로운 외국어를 익혀 보고, 근력을 키우는 운동을 한다든지 아니면 시원한 장소에서 독서하는 것도 괜찮다.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오프라인 서점에 가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시원한 곳을 찾아서 가볍게 걷는 것도 좋겠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것도 의미가 있다.

다들 편안하고 건강한 여름 보내세요.

키키 키린(樹木希林, 1943-2018)이라는 일본의 여배우가 생전에 남긴 생로병사에 대한 메시지가 한 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책의 제목은 『키키 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 말』이고, 표지 그림은 흰색과 초록색이 적절하게 믹스되어 있다. 이 색깔은 인생의 여름을 의미하는 것일까? 키키 키린은 “할머니들이야말로 세상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녀는 평생에 걸쳐 깨달은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키키 키린은 우리에게 “부디 세상만사를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유쾌하게 사시길”, “너무 노력하지도 너무 움츠러들지도 말고”, “내가 가진 걸로 어떻게든 해나가는 거죠”라고 담담하게 당부한다.

이진아

역사와 예술을 공부하고 글 쓰는 연구자.
『무희』를 번역하기도 했고, 『네이션과 무용: 최승희의 민족 표상과 젠더 수행』이라는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