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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있다 ①

파도가
책장을 넘길 때 - 책 읽는 도시를 위한 작은 물결의 시작

강동훈

부산에 ‘바다를 품은 도서관’이 생겼다.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보관하고 열람하는 공간을 넘어, 도시의 정체성과 지역민의 삶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거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 이름처럼 바다와 도서관이 나란히 놓인 이 공간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지닌 문화적 가능성과 시민의 일상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한다.

책의 도시를 꿈꾸며

부산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해양도시이자 관광도시이지만, ‘책의 도시’라는 정체성은 아직 선명하지 않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활동해온 독립서점과 작가, 책방지기들, 그리고 공공도서관의 꾸준한 노력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도시 전체의 문화로 자리 잡기엔 다소 미약했다. 이 지점에서 ‘부산바다도서관’은 단순한 시설 확장의 의미를 넘어, 도시 문화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다시 읽기 시작하는 시대

성인 종합 독서율이 43%를 기록하던 해, 사람들은 책을 점점 더 멀리하는 듯 보였다. 책이 어느새 ‘아는 사람들만 읽는’ 취향의 물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LP나 피규어처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세계. 그런 우려는 점점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책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유명 연예인이 브이로그에서 소개한 책 한 권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출판인들만의 잔치일 거라 여겨졌던 서울국제도서전엔 15만 명이 몰렸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책이라는 존재에 다시금 사람들이 시선을 두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을 단지 ‘유행’이라 부르기엔 무언가 더 단단한 뿌리가 있었다.
제3차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은 ‘사회적 독서’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었고, 수백 개의 독서모임, 동네서점 활성화, 심야책방 운영, 책 읽는 일터 인증 사업 같은 시도들이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이어져 왔다. 물론 그런 활동이 우리의 일상에 분명히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있다. 대부분의 독서모임은 10명 내외로 구성된 소규모 모임이었고, 카페나 서점, 스터디룸처럼 다소 은밀한 공간에서 조용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곁엔 ‘책을 읽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느낌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은 모임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고, ‘혼자 읽기’에서 ‘함께 나누는 읽기’로 독서의 의미는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책을 다시 거리로

서울야외도서관은 그런 변화의 상징 같은 공간이었다. 서울광장, 광화문, 청계천 같은 도심 한복판이 책을 읽는 자리로 바뀌었고, 돗자리와 빈백, 나눠 읽는 문장 하나가 책을 또 하나의 일상으로 만들었다. 독서는 더 이상 조용한 방 안의 일이 아니라, 햇살 아래서 나누는 대화이자 여가가 되었다.
이 변화는 2024년 부산에서도 조용히 일어났다. 부산시민공원에서 시작된 ‘잔디밭 도서관’은 빈백과 돗자리, 그리고 시민 기증 도서 2천 권으로 운영되었고, 약 한 달 동안 2만 명의 시민이 그 공간을 다녀갔다. 바람이 좋고, 날이 좋은 날, 잔디 위에서 펼친 책 한 권이 사람들을 다시 독서의 자리로 불러낸 것이다.
그리고 올해, ‘부산’이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새로운 시도가 시작되었다. ‘부산바다도서관’. 책과 파도가 함께 머무는 이곳에서, 우리는 또 다른 독서의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도시가 책을 품는 방식

부산바다도서관은 리딩존, 디지털 리딩 체험, 반려동물과 머무는 야외 독서존, 손으로 문장을 새기는 필사존, 책을 처방해주는 북 큐레이션, 독서토론과 모임 지원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서관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자유롭고 다채로운 공간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책을 읽고, 마음에 남는 문장을 적고, 그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 누군가에겐 처음 경험하는 ‘함께 읽는 독서’일지도 모른다. 이제 막 문을 연 이 도서관이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택과 변화가 필요하다.

하나의 리듬, 하나의 목소리

현재 부산에는 잔디밭 도서관(부산시설공단), 바다도서관(부산문화재단), 가을 독서문화축제(부산도서관)처럼 각기 다른 주체가 다양한 독서 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프로그램마다 특색은 있지만, 시민들이 느끼는 일관된 흐름이나 방향은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전주처럼 한 부서(예: 전주시 도서관산업과)가 모든 독서문화 프로그램을 총괄함으로써, 콘텐츠의 독립성과 연속성을 보장하는 모델은 부산에도 참고가 될 수 있다. 전담 TF가 구성된다면, 연중 이어지는 독서문화의 리듬을 만들 수 있다. 시민에게는 흐름이 보이고, 정책 입장에서는 중복 예산이나 자원 낭비도 줄어든다.

B-북스팟, 읽기의 일상화

‘바다도서관’에서의 경험이 그날 하루로 끝나지 않도록, 일상의 독서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B-북스팟’이다. 이벤트성 공간을 넘어, 북스팟은 집 근처에서 언제든 다시 책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방문자가 책을 읽고 난 뒤 북스팟을 검색하고 찾아가도록 유도하고, 거기서 도서비 할인, 독서모임 무료 참가권 같은 혜택이 주어진다면 자연스럽게 ‘독서의 지속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
특히 서울의 ‘힙독클럽’은 참가자들의 마일리지를 연계 서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라고 한다. 우리도 지역화폐를 활용하여 참여의 경험이 연속적인 소비로 이어지는 프로세스를 만들 수 있다. 경험이 소비로 전환되었을 때 문화는 자생력을 갖출 수 있다.

부산이라서 가능한 것들

부산바다도서관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부산’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도시의 가장 큰 자산인 바다를 제대로 활용한 프로그램은 분명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워터프루프 북을 들고 바다 위에서 책을 읽는 ‘찰랑찰랑 북클럽’, 프로그램 참여자가 누적 점수 상위권에 오르면 작가와 함께 요트에 올라 선상 북살롱을 열어보는 것도 좋다. 책을 읽고 해변을 함께 달리는 ‘북 러닝 클럽’도 상상해볼 수 있다. 부산이니까, 가능한 일들이다.

새로운 흐름을 위하여

부산바다도서관은 단지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도시 문화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다시 책을 찾고, 함께 읽고, 일상을 나누는 장면들이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진다면, 부산은 더 이상 ‘책의 도시’라는 수식어에 어울릴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곳이 부산의 바다처럼 넉넉하고 깊은, 그리고 언제든 새로운 파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문화의 출렁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강동훈

서점 '크레타' 대표.
독서모임을 통해 책과 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책이 갖고 있는 연결과 치유의 힘을 믿고 전포동에서 서점 ‘크레타’를 시작했다.
크레타를 찾는 순간만큼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기다움’을 묻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꾸려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