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그리고
지난호 보기

감 좋은 가을

박보은

유난히 감(感)이 좋은 날이 있습니다. 폰을 보다 고개를 들었을때 눈 앞에 물웅덩이가 있는 날이라든지, 우산을 챙겼는데 때마침 비가 내리던 날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이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술 또한 우리를 감각하게 하고, 그를 통해 감정을 울리며, 감화를 거쳐 감응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눈으로 색과 형태를 담으며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 기억이 겹쳐지거나 행복함, 그리움과 같은 감정에 스며드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러한 감정은 삶의 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익숙한 풍경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고, 사소한 것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한 편의 연극, 한 곡의 음악이 저마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변화는 ‘나’에게만 머무는 걸까요? 함께 공연을 본 이들과 감정을 나누고, 전시장에서 옆 사람의 호흡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울림을 주고받습니다. 이렇듯 예술이 맺어내는 감응은 공동체적 경험이자 삶의 확장입니다. 예술은 우리의 일상 속 변화를 끄집어 냅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힘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이 줄 수 있는 깊은 울림은 오랜 시간과 성숙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예술이 완성되면 좋겠지만, 많은 시간과 여러 과정, 성숙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마치 가을을 대표하는 과실(果實)인 감이 맛있는 홍시로 익어가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딱딱함에서 물렁함으로 부드러워지는 그 시간 속에서, 감은 여러 맛의 층위를 열어주며 우리의 입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 과정을 바라보면, 감각 또한 닮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한순간에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 켜켜이 쌓이며 무르익는 감각이 있습니다. 자연의 풍파를 겪으며 익어가는 과실처럼 우리 내면의 감각도 시간을 견디며 성숙해집니다. 오랜 농익음 끝에 탄생한 작품이라는 결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단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성숙과 무르익음, 그리고 삶의 결실에 따른 수확의 결과물입니다.

이번 가을호는 여러 노력 끝에 가을처럼 무르익은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 안에는 모든 계절을 견뎌온 예술가들의 이야기와 발자취가 담겨있습니다. 수많은 준비와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예술을 다루며, 이를 계절의 흐름과 연결짓습니다. 가을은 끝이 아닌 중간의 계절, 더욱 깊어지기 위한 성숙의 시간입니다. 마찬가지로 <공감 그리고> 또한 완성된 답만을 제시하기보다, 활동 속에서 피어나는 예술인들의 생각과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가을이 과실을 무르익게 하듯, 예술과 삶을 둘러싼 감각과 과정을 천천히 소개합니다. 독자와 예술가 그리고 지역이 서로 감응하며 공명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번 가을호가 지향하는 방향입니다. 예술은 가을이라는 계절의 특성을 닮아, 미완의 상태 속에서 더 짙어지고, 풍부해지며 예술인 각자의 결실을 향해 나아갑니다.

감각이 열리는 순간은 예술 작품을 보는 전시장과 무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일상의 틈에도 불현듯 찾아옵니다. 예술은 우리 안의 감각을 일깨우고, 감정을 흔들며,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이번 가을호가 여러분에게도 삶 속의 ‘감(感)’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박보은

디자인 스튜디오 ‘로크 스튜디오’ 운영.
부산에서 로컬 관련 기획 및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지역에 대한 이야기와 연구를 기록하며 써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