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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은 축제, 깨어나는 도시 - 부산국제영화제, 덜어내고 느끼다

김필남

감각에서 감응으로,
스크린 너머로 확장된 축제

‘무르익었다’는 말은 곧 성숙함을 뜻한다. 양적으로 성장한 프로그램의 규모나 게스트의 화려함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성숙이 관객의 감각을 얼마나 확장 시켰는가’일 것이다. 올해 30회를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는 328편의 상영작을 선보이며 역대 최대 관객 수를 기록했다고 알려졌다.
특히 커뮤니티비프와 동네방네비프 그리고 포럼비프까지 시민이 영화에 다가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해지면서, 축제의 폭은 그 어느 때보다 넓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의 영화제는 대체로 보여주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즉 선택된 작품을 선택된 관객이 정해진 자리에서 보는 것이 영화제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부산국제영화제는 그 틀을 벗어나 도시의 감각과 시민의 감정이 서로 닿는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초창기 부산국제영화제와 달리 현재 영화제는 어느 특정 공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동네방네비프의 경우 공원, 해군작전사령부, 병원, 공항, 카페 등 일상 공간을 스크린으로 바꾸었다. 굳이 해운대나 남포동에 가지 않아도 가을, 부산의 모든 장소를 영화로 채웠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순간, 이 영화는 단순한 예술이나 축제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즉 그들만의 무대가 아닌 우리 모두의 영화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커뮤니티비프 또한 관객의 참여를 예술적 경험으로 확장한다. 시민들이 직접 기획에 참여하고, 결말 토론 상영, 블라인드 시네마, 시 낭송회, GV와 라이브 드로잉 등 다양한 형식으로 축제의 언어를 새롭게 쓴다. 이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선 감응의 차원, 즉 관객이 예술의 공동 창작자가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생각해 보니 부산국제영화제도 점점 부산이라는 도시를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부산은 경계의 도시다. 바다와 산, 남과 북, 산업과 관광, 한국과 세계의 경계선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근현대사의 상흔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고, 항구는 언제나 새로운 만남과 이별의 서사를 품고 있다. 이 복합적인 맥락 속에서 영화제는 단순한 문화행사를 넘어 도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최근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러한 도시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동네방네 비프는 지역 커뮤니티와 협업하며 영화를 통해 도시의 새로운 시선을 제안하고, 커뮤니티비프는 청년, 예술인, 비평가 등 다양한 시민 그룹이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적 예술을 도모하고 실천의 장을 만든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참여를 넘어, 예술과 지역의 실질적 연결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제 영화제의 영화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도시적 사건으로 재탄생하고, 시민은 관객을 넘어 도시문화의 공동체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다.

포럼 비프,
‘묻는 축제’로서의 가능성

띄엄띄엄 개최되던 포럼 비프의 경우 3년 만에 다시 열렸다. 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역대 최대 규모로 펼쳐진 만큼,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영화 그 자체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올해 포럼 비프는 “다시, 아시아영화의 길을 묻다”를 주제로 산업, 정책, 교육, 기술, 비평을 아우르는 아홉 개의 세션이 진행되었다. 이때 핵심은 제목 그대로 ‘다시 묻는다’는 태도에 있다.
영화제는 하나의 축제이지만 동시에 영화라는 예술을 성찰하고 질문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의 미래, 아시아영화의 지속 가능성, 플랫폼의 확장과 위기, 영화 산업의 노동 구조와 불평등, 영화 교육 등의 문제들은 관객의 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 질문 없이는 영화의 내일도 없다.
그동안 영화제는 종종 초청 편수나 스타 게스트의 화려함으로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 필요한 것은 자기 반성이 가능한 축제, 즉 영화의 빛뿐 아니라 그 그림자까지 마주할 수 있는 장이다. 노동의 착취, 산업 자본의 종속, 지역 간 불균형, 글로벌 OTT의 명암처럼 다소 불편한 주제들 또한 영화제의 논의 안으로 끌어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럼 비프는 영화와 영화제를 잇는 가장 중요한 연결축이라 할 수 있다. 스크린 밖의 현실을 직시하고 영화제를 사회적 사유의 장으로 확장시키는 포럼이야말로 부산국제영화제가 단순한 축제를 넘어 살아 있는 담론의 공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아직은 작고 조심스러운 걸음이지만, 바로 이런 ‘말하기’의 장이야말로 영화제가 진정으로 성숙해질 수 있는 발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할 수 있는 축제’, ‘질문을 허락하는 축제’ 그것이 앞으로 부산국제영화제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감각일 것이다.

무르익다, 감화의 시간

홍콩국제영화제나 도쿄국제영화제 등 아시아 각지에서도 의미 있는 영화제들이 꾸준히 열리고 있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아시아 영화의 중심’ 그리고 지역성이라는 비전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며, 민간의 자율성과 비평적 담론을 함께 확장시켜온 영화제는 드물다. 영화제 출범 초기부터 거대 자본이나 국가의 개입보다는 아시아 신진감독 발굴과 지역 영화문화의 자생력 강화를 우선시해온 부산국제영화제는 화려함보다 방향을, 규모보다 질문을 중시해온 드문 축제다. 이제 부산국제영화제는 하나의 전통이자 또 다른 전환점을 예고하는 실험의 장으로 서 있다.
스타 감독과 배우들이 오고, 티켓이 매진되고, SNS에서 화제가 되는 축제는 이제 기본값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그 너머 던져야 할 질문들이 남아 있다. 축제를 통해 도시는 어떤 감각을 얻고, 어떤 감정을 공유하며, 어떤 감화로 나아가고 있는가? 부산국제영화제는 관객이 ‘와주는’ 축제에서, 시민이 함께 만드는 축제로 점차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상영 편수나 관객 수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도시의 구조, 지역과의 관계, 예술과의 거리, 그리고 삶의 시간들이 축제 안에서 다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제가 도시의 공간을 새롭게 호흡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관객이 예술과 사회를 동시에 사유하게 하는 장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감각을 깨운다. 그 감각은 종종 불편하고 낯설며 때로는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통해 우리는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만난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영화 그 자체가 아니다. 영화를 매개로 깨어나는 감각, 함께 떨리는 감정, 그리고 우리를 바꾸는 감화의 순간이다.
무르익은 과일은 단지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운 씨앗이 되어 다시 자라기 위한 준비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로 서른은 부산국제영화제를 돌아보고, 도시와 대화하며, 예술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성찰의 시간’을 맞이하는 숫자이다.

김필남

200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저서로 『삼켜져야 할 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