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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잇다 | 숨은 공간 소개

<제이작업실>에서
감 잡기

방정아 사진권순일

감 잡았어!

탐스럽게 익은 대봉감을 청설모가 한 아름 안은 사진을 보았다. 어디선가 퍼 왔던 것인데 그 사진은 결국 나의 카카오톡 프로필사진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아재 개그 같지만 한번씩 그 사진을 보면 히죽 웃는다. 어떻게 보면 화가인 나의 삶도 끝없는 감 잡기 같다.

# 제일작업실

오랜 시간 막연히 ‘바다가 보이는 마당 있는 작업실’을 꿈꾸었다. 그러다가 나의 미래의 작업실을 어느 날, 한 애니메이션에서 보게 되었다. <벼랑 위의 포뇨>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주인공 꼬마 쇼스케의 집이었다. 그곳은 바다마을 높은 언덕 위의 집이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소박한 집의 마당 수돗가와 화초들 그리고 무엇보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 보이는 푸르디 푸른 바다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마치 내 작업실을 당장 찾은 것 마냥 기뻤다. 하지만 그 후로도 몇 년간 나는 어느 허름한 상가 건물 2층에서 작업실 생활을 이어나갔고 그러다가 우연히 좌천동 언덕에서 ‘미래의 작업실’을 찾게 되었다. 2013년이었다.
그곳엔 촘촘하게 박혀있는 집들과 앞을 가로막은 아파트 숲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있었다. 시원하고 심플한 바다는 아니었지만 나를 외롭게 하지 않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내 작업실을 가로막는 솟은 아파트들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헤쳐 눌러보는 상상을 곧잘 하곤 했다. 그러면 왼쪽으로는 미8부두가, 오른편으로는 영도가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 깜짝 놀랐고, 곧이어 드러나는 항구 컨테이너 박스들과 크레인과 정박한 빽빽하게 자리하는 배들이, 매립으로 팍팍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푸르게 출렁이는 물들 또한 나를 늘 매료시켰다.
지하철 1호선 좌천역 역사 내 복도에는 조선시대 좌천동을 묘사한 회화(1748년, 35.2×70.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걸려 있다. 이성린이 그린 <사로승구도>이다. 좌천동의 지형적 특성을 잘 살려낸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좌천동 옛 풍경이 그려진 그림을 뚫어지게 보노라면 머릿 속은 또 상상하기 시작한다. 지금과는 그 모습이 너무 달라서 내 작업실은 어디쯤 일까 하고 한참 헤맨다.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절벽 위에 내 작업실을 얹어 본다. 그 순간 수백 년 전과 지금의 좌천동이 빠르게 이어진다.
바다가 보이는 남향의 마당 있는 작업실, 그 작업실 찾아 헤매던 20여 년의 시간을 보상받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의 시간들을 감사히 여긴다.

<사로승구도>

# 제이작업실

시간이 흐르고 작업실도 용도에 맞게 몇 번 고쳐 쓰게 되었고 또 작업량이 늘어나 작품을 보관할 독립된 수장고가 필요하게 되었다. 수장고는 작업실 근처에 구하는 게 좋다고 늘 생각했던 터라 근처의 빈 집이나 세 나온 곳 등을 찾아보곤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작업실 200미터 거리의 적당한 곳에 수장고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곳은 천장이 높은 옛집으로 3층 높이의 2층 집이었다. 여러 매력이 있었다. 비탈진 지역 특유의 공간 특성상 앞은 트였으나 뒤는 막힌 이곳을 리모델링을 하면서 어려운 점도 있었다. 하지만 옛집이라 요즘 보기 드문 공간들도 있었는데 예전엔 흔했던 다락이다. 2층 다락방 벽을 철거하자 하나의 공간에 바닥 높이가 다른 두 공간이 생겨났고 입체적으로 작품 설치나 감상이 가능한 재미난 공간이 만들어졌다. 어떨 때에는 음악공연 무대가 되기도 했고 또 어떨 땐 설치작품이 재미있게 표현되는 공간이 되었다. 그곳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장고 이외의 남는 공간이 생기자, 공간이 생기는 과정을 지켜봤던 동료 작가들이 여러 의견들을 보태기 시작했다. 나의 제2의 작업공간이자 쇼룸, 작가들 사랑방, 그러다 보니 전시장도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성격을 담다 보니 <제일작업실>의 확장이자 다양한 변신의 공간으로서 <제이작업실>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제이작업실>의 아랫동네인 교통부 일대는 7·80년대에는 고무 공장들이 성업했었다. 아랫동네에서 집을 못 구한 그 공장 직원들은 윗동네인 이곳까지 세 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이 동네도 함께 북적였다. 집주인들은 방을 쪼개고 쪼개 세를 내었는데, 어떤 집은 6가구가 함께 살기도 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고무공장은 옮기거나 사라졌고 많은 사람들은 신도시나 아랫동네로 이사를 갔다. 이제는 낡아 흔적만 남은 방앗간, 미장원, 쌀집, 영어학원 간판 시트지가 희미하게 간신히 붙어 있다. 그리고 지금은 한적한 마을 길이 되었다.
<제이작업실>은 지하철 1호선 좌천역에서 <정공단>과 <안용복 기념 부산포 개항문화관> 을 거쳐 모노레일 타고 내려 왼쪽으로 꺾어서 산책하듯 오면 도착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바다 가득 안고 걸을 수 있는 길이었는데 이제는 불쑥 나타나 바다를 가려버린 고층 아파트들이 산책의 즐거움을 앗아가 버렸다. 원망스럽다.

갤러리 제이작업실

부산시 동구 증산동로 17 2층

010-2595-3286

j2artspace

<제이작업실> 건물의 옛 주인이 쓰던 절구통은 부레옥잠 가득한 작은 연못이 되었고, 이층 테라스 펜스 위에는 건물을 지키는 조형물인 고양이 두 마리(김경화 작가 작품)와 노란 옷의 두 사람 조각이 자리 잡았다.
앞 뒤로 집이 다닥다닥 붙은 탓에 뒷집에서 정성껏 키운 능소화와 빨간 장미들은 <제이작업실>에게 철철이 바뀌는 뜻밖의 기쁨이 되고 있다.
1층의 수장고를 제외한 한편에는 나의 어머니이자 화가이셨던 고 최홍자 화가의 기억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곳엔 최홍자 작가의 작품과 생전에 사용한 화구 및 작품 자료들을 전시 중이다. 해마다 전시 주제를 바꿔서 전시하고 있다. 2층 전시 있는 기간 중에 개방하고 있다.
2층 전시장 오른편 산자락은 그 모양도 노을도 일품이다.
동료작가들이나 관객들과 테라스에서 와인과 함께 하는 수다는 환상의 짝꿍이다. ‘해가 사라지는 시간’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넘어가는 초저녁의 제이작업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잠시 잊고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방의 얼굴이 점점 입체감 없는 신비로운 푸른 빛으로 변하는 경험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감을 잡는 시간이다.
2022년 겨울 첫 전시로 시작한 <제이작업실>은 일 년에 5~6회 정도의 개인전 및 단체 기획전을 열어 왔었고 내년부터는 새로운 성격으로의 변화를 모색 중이다. 동료 작가 및 지인들과 내용을 차곡차곡 만들어 가려 한다. 다시 새로운 감 잡기를 시작한다.

방정아

일상의 부조리와 허탈한 웃음에 대한 작업을 이어 온 화가.
오늘도 북항이 내려다보이는 작업실에서 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