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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잇다 | 대담

감 익은 예술가들

진행박미라
대담김경화, 백현주, 정광모
정리양영석 사진권순일

감은 시간이 만들어내는 예술이다.
햇볕, 비, 바람 그리고 기다림이 겹겹이 쌓여 감은 무르익는다.
이번 대담은 무르익은 감으로 세상을 감각해 작품을 빚어내는, 설치미술가 김경화, 작곡가 백현주, 소설가 정광모와 함께했다.
시종일관, 잘 익은 감의 향기롭고 맛난 이야기가 펼쳐졌다.
『공감 그리고』 편집위원 박미라
『우선 각자 본인 소개와 작품관에 대한 소개, 부탁합니다.
김경화 부산 중구, 원도심에서 10여 년째 설치미술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한복, 시멘트 폐박스, 오래된 천, 자연물 등 일상의 오브젝트를 재료로 삼아 작업합니다. 특히 오랜 시간이 스며든 재료들, 가령 나전칠기 같은 전통공예 작품들을 재료로 해서 숨은 정수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요즘에는 바느질 작업을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데, 연약한 천들이 연결되어 단단해지고 무한대로 펼쳐지는 속성이 힘없는 사람들의 연대를 은유하는 것 같아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설치미술가 김경화
백현주 구서동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루체테 음악연구소, 부산작곡마당의 대표직을 맡고 있고, 부산지휘자 합창단 반주도 하면서 작곡 활동하고 있습니다. 극음악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는 합창곡 작업을 좋아했는데, 내러티브가 있는 음악들, 음악과 언어가 결합된 장르에 끌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양음악을 베이스로 하지만 전통 악기에도 관심이 많아서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작곡가 백현주
정광모 40대 후반까지 법률사무소 사무장으로 일을 하다가 40대 후반부터 소설 공부를 시작해 등단했습니다. 이모작 인생을 살게 되면서 15년째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단편집 5권, 장편소설 4권, 서평집 5권을 냈습니다. 리얼리즘에 판타지나 SF를 결합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부산의 작가들 사이에선 드문 케이스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최근에 낸 작품집 『멸종과 이혼의 연대기』에는 일곱 작품 중 세 작품을 SF소설로 채웠는데, 이건 폭넓은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마음과 또 그만큼 넓은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정광모
부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선생님들에게, 부산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요?
김경화 또따또가 1기 작가로 입주하게 되면서 중구에 터를 잡았는데, 원도심에 있다 보니 부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전에는 막연히 떠도는 이야기에만 노출되어 있었지만, 지역의 축적된 역사와 변화를 알게 될수록 부산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자연히 더 집중하게 됐습니다. 구체적인 사회 이슈를 결합하고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지기도 해서, 모임을 통해 만난 분들과 부산 근대사와 특색에 관한 이야기도 자주 나누고 있습니다. 부산의 지리적 특성에서부터 전쟁과 피난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워낙에 많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부산의 매력에 자연스럽게 빠져든 것 같아요.
백현주 부산은 제가 나고 자란 곳이고 굉장히 익숙한 곳이지만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어요. 누군가 저의 근원을 물을 때, 출생지가 부산이라는 걸 언급하는 정도였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다른 계기로 부산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됐어요. 부산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지만 그 번영의 뒷면에는 여러 안타까운 사연이 많아요. 여전히 사회적 약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역사적으로도 많은 수난을 겪었죠. 그 속에서 진주 같은 매력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비로소 부산을 다시 바라보게 됐어요.
정광모 부산은 역사적으로 개방과 교류를 담당해 왔어요. 담배, 고구마와 같은 타지의 작물이 동아시아 해역을 통해 옮겨진 역사성을 지니고 있죠.
부산은 열려 있습니다. 대양을 통해 지구라는 행성의 모든 곳으로 뻗어나가요. 그런 이미지를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히 그 이미지는 제 소설에도 녹아들었고요. 그런 면에서 보면 부산은 제 생활의 터전임과 동시에 작품의 기저에 견고하게 깔린, 세계관의 기초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분들은 이번 호의 주제인 ‘무르익은 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들입니다. 좋든 싫든 ‘중견 예술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실 것 같은데요. 중견 예술가로서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백현주 고백하자면 저는 후배였던 적이 없어요. 서른다섯에 작곡을 시작했는데, 어어? 하다 보니 어느새 중견 예술가 취급을 받고 있더라고요. 후배의 자리에서 선배에게 배우거나 도움받은 기억이 없으니 억울하기도 해요. 하지만 마냥 투정만 부릴 수 없는 것이, 다른 분야도 비슷한 상황이겠지만 음악계는 더더욱 다음 세대의 소멸이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다음 세대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랄까, 어깨가 무거움을 느끼고 있어요. 요즘은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이신 한형석 선생님을 주제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이에요. 그분은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상처받고 방치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신 분이라, 음악에도 그런 정서가 녹아있거든요. 작업을 하면서 후배들을 위해 할 일이 무엇인지,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길 바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신진 예술가이고 싶습니다. 떫은 감이라 불러도 좋아요. 신진 일래요.
김경화 백 선생님은 작곡을 하시니, 함께하는 작업이라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니, 책임감도 막중하실 것 같은데, 저는 중견 예술가로서 어떤 영향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현재는 하지 않고 있어요. 그렇다고 제가 쭉 그래왔던 것은 아니고 또따또가 작가로 입주하게 되면서 협동조합을 만드는 등 나름의 활동을 해왔어요. 하지만 결국에는 단체 활동이 한계에 부딪히는 것을 경험한 뒤 예술가 개개인으로 중심을 옮기게 했어요. 백현주 선생님처럼 뭐라도 하자, 결심을 하고 고민하고 부담감을 느끼고 또 그것을 거부하기도 하는, 자기분열적인 상태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어요.
정광모 중견 작가의 역할을 고민하는 것은 신예 작가들과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를 고민하는 것과 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관련한 경험담이 하나 있어요. 언젠가 중국 소설을 한 편 읽었는데, 그 속에 묘사된 어느 장소에 가보고 싶단 열망이 끌어올라 막무가내로 비행기에 올랐어요. 결국 중국의 어느 강, 물이 굽이치는 장소에 서서 작품을 곱씹었죠. 중견 작가들의 역할이 바로 이거라고 생각해요. 신예작가들이 기발한 착상과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분해한다면, 중견 작가들은 그간의 경험을 작품에 녹여 현실을 마주하는, 나아가 직접 참여하고 싶게끔 하는 작품을 쓰는 거죠. 부산에 터 잡은 중견 작가라면 40계단을 소재로 하는 글을 쓴다거나 부산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겁니다. 제 소설집인 『작화증 사내』의 「기억 금지 구역」이라는 작품이, 조금이나마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모신 세 분은 각자의 분야에서 전통과 현대, 리얼리즘과 판타지, 동서양 등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각자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해주실 수 있을까요?
백현주 아마 제가 나혜석 선생님의 작품을 할 때, 전통 음악가들과 협업한 것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저는 전통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아요. 가끔 저를 전통음악과의 협업을 전문으로 하는 음악인으로 알고 계시는 분이 있더라고요.(웃음) 제 작업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돼요. 전통음악뿐만 아니라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영역에서 신선함을 느끼고 앞으로도 그 호기심을 거침없이 해소할 계획이에요.
김경화 저 같은 경우에는 최근 자개장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저 역시 자개장에 대해 조예가 깊은 건 아니에요. 처음엔 고도의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들이 외면받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자개장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자개에는 민중들이 소망하는 건강, 부귀의 의미가 녹아있어요. 대단한 사람들의 신화적 작품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중이 그려낸 그림이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거든요. 자개 장인분들을 찾아가서 기술적인 도움도 받고 그 과정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도 있지만, 평생 다듬은 기술을 감히 따라 할 수는 없더라고요. 따라 할 수 없기에 협업이 더 매끄러웠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업이 뜻깊었어요. 작업하는 저도, 제 작품을 보는 관람객도 낯선 것을 접할 수 있으니 제 융합은 나름의 소용이 있는 것 같아요.
정광모 저는 기본적으로 리얼리즘과 SF판타지가 같은 작품 속에서 교류하거나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스타일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가 융합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융합은 필연적인 거예요.
정광모 리얼(Real), 현실이란 뭘까요? 현실을 느끼는 우리 뇌는 두개골 속에서 바깥으로부터의 시각, 청각, 촉각 등의 신호를 기반으로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그럼, 과연 현실은 존재하는 걸까요? 우리가 함께 이야기 나누는 이 순간조차도 현실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래서 저는 현실이 곧 소설이고 소설이 곧 현실이니 소설 자체가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 서거나 그 둘을 섞어 만들어지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리하자면 소설은 판타지와 현실이 어울려 만들어진 또 하나의 현실인 거죠.
예술 분야에 있어 인공지능은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 중의 하나입니다. 이 자리에서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정광모 지금은 AI의 문제점이라든지, 부작용에 대해 걱정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AI는 웹에 떠도는 정보 중 확률이 높은 것을 선별해 배열하는 수준이라, 좀 더 발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완인 거죠. 그럼에도 제조업이라든지 연구개발 분야에서 활용도가 높아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AI가 발전함에 따라 기존에 인간이 행하던 예술이 대체되는 시대가 온다면 예술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묻고 재정의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백현주 음악계에도 AI를 두고 논쟁이 많아요. 몇 년 전부터는 연주하고 작곡하는 AI가 음악가들을 위협하지 않겠느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어요. 그러면서 AI시대 예술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도 자문하기도 했죠. 제 주위의 음악인들은 대체로 AI가 우리 삶을 위협한다면 반항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최고의 결과물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거든요. 예술은 향유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교류하는 사교의 장을 마련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음악회라는 공간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충분히 AI에 반항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경화 미술계는 다양한 매체를 다루고 있어요. 이미 AI를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작가도 많고, 저처럼 잘 모르는 작가도 있어서 사실 한 치 앞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AI가 보편화된다고 했을 때, 인류가 존립하는 데 필요한 상당 부분의 노동을 AI가 대체하게 될 거라는 사실은 자명해 보이거든요. 그러면 인류가 노동에서 일정 부분 해방되고 예술적 발전을 이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고대 그리스, 노예제 시대에 노동의 책임이 없던 자유민들이 철학을 향유하며 학문을 급속도로 발전시켰듯이 AI의 보편화는 예술사 진보에 큰 획을 그을 것 같아요.
끝으로, 세 분이 함께 모인 기회에, 서로에게 궁금했던 점을 묻고 답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정광모 먼저 김경화 작가님께, 자개는 물론 시멘트로도 작업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이에 관해 좀 더 자세한 설명 듣고 싶습니다.
김경화 시멘트는 도시를 이루는 주재료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것으로 도시에서 소외당하는 존재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건 인간일 수도 있고 길고양이나 비둘기 같은 연약한 생물들일 수도 있죠. 같은 맥락으로 오래된 천을 활용해서 작업하기도 해요.
정광모 백현주 작곡가님, 서양음악과 국악은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양쪽을 넘나드는 활동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부산작곡마당’이라는 모임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백현주 전통악기(국악)를 작업한 것은 새로운 소리에 대한 호기심, 신선함을 느껴서였고요. 관심이 깊어지니 많은 분들에게 도움받고 공부도 하면서 작업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부산작곡마당’이라는 단체는 작곡가들의 모임인데,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고 작품 발표를 희망하시는 분들이 자유롭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다음 세대 작곡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모임이에요.
김경화 백현주 선생님께, 한형석 선생님에 대해 여쭙고 싶었는데, 앞선 문답에서 궁금증이 해소돼서 마지막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웃음)
백현주 정광모 작가님께서는 15년 동안 책을 아주 많이 내신 걸로 아는데, 그렇게 다작하려면 작업 페이스가 남달라야 할 것 같아요. 저는 마감의 힘을 빌려서 글을 쓰는데, 작가님의 집필 스타일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정광모 저는 작품을 상당히 일찍 씁니다. 청탁을 받으면 마감 보름 전에는 완성하는 편입니다. 가끔은 청탁이 없어도 글을 써 놓곤 합니다.(웃음) 일정을 스스로 조정하는 이유는, 문학이란 분야가 퇴고가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장편소설의 경우는 한 번 고치는 데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니까 마감일에 맞춰 작업하겠다고 계획하면 만족할 만한 퇴고를 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부산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바라는 점과 개인적 목표를 밝히는 것으로 오늘 대담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백현주 업의 측면에서는 그때 그때 하고 싶은 작업과 해야 할 일을 균형 있게 하고, 그 외적인 부분에서는 후배 예술인들이 마음 편히 활동할 수 있는 무대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김경화 최근에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 개막식 공연을 보고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광주, 제주, 대구 같은 지역은 다른 지역과 동등한 지위로 연계하고 협업하고 있는데, 유독 부산은 세계적인 것을 차용하는 것에 치중하는 느낌이에요. 부산다운 작품을 세계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항상 주지하면서 관심사가 비슷한 작가들과 공부하고 이야기하며 작업을 꾸준히 할 계획입니다.
정광모 도시의 정체성은 역사와 문화, 기억에 의존합니다. 부산은 바다와 강과 산을 함께 지니고 있는 보기 드문 자연 친화 도시에요. 거기에 부산만이 가진 문화적 색채를 분명히 하는 것이 부산이라는 도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생각합니다. 저 같은 시민들뿐만 아니라 도시를 경영하는 행정, 정치 분야에서도 부산 색을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방향으로 가열차게 나아갔으면 합니다.

박미라

달콤, 쌉쌀, 오싹, 포근한 이야기를 찾아 오늘도 두 눈에 불을 켜고 모험을 나선다.
「다정한 고랄라 목욕탕」, 「별이와 북극여우」, 「오만데삼총사의 대모험 1, 2」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