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에, 자비출판을 한 적이 있다. 책을 내야 작가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 신춘문예나 공모전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종이책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다. 여기저기 썼던 한 페이지 분량의 짧은 소설들을 엮어 일단 장편소설로 완성했다. 편집 디자이너였던 여자친구(지금의 아내)와 일러스트레이터 친구의 도움으로 첫 책이 세상에 나왔다. 외계인 여자와의 러브 스토리 『채리(2004)』다. 지금 읽어보면 부끄러운 구석도 많고 감탄하는 구석도 많은 나의 첫 책이다. 무모하게 천 권을 만들었는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창고에 조금, 쌓여 있다. 나는 가끔 책등의 색이 바랜 첫 책을 쓰다듬어 본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이 책을 만들지 않았다면 과연 소설가가 될 수 있었을까? 책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아마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 파일로만 저장되어 있어 빛을 보지 못한 다른 이야기들을 떠올려본다. 모든 것을 클라우드에 영원히 저장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종이책이 오히려 더 의미 있게 살아남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자비출판 책
2.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2010)』라는 에세이/소설을 썼다. 뉴욕의 크고 작은 50여 개의 서점에 들러 인터뷰하고 그들이 추천하는 책을 정리했다. 사진도 찍고 뉴욕의 서점 지도도 만들었다. 특색 있는 서점들이 점점 사라지는 안타까움에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에세이 중간에 소설을 삽입했다. 미래에는 모든 책이 거의 사라져 버렸는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들을 보전하기 위해서 한 여자가 미래에서 찾아온다. 미래에 책이 사라지는 원인이 되는 소설을 쓴 사람이 바로 나이며, 그 여자는 내가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내용이다. 서점 정보만 담으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황당한 이야기를 섞어 넣었다.
책이 사라질 거라는 예상은 틀린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전자책 시장이 종이책을 대신할 거라는 예상을 했었는데, 전 세계적으로는 2025년에도 책의 대부분의 매출은 종이책에서 나온다. 국내 시장은 많이 다르다. 웹소설의 매출이 1조를 넘어섰고(2023년 기준), 종이책의 소설 시장을 가뿐히 앞질러버렸다. 이런 웹소설의 약진은 그때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국내 순수 문학 분야도 젊은이들의 관심이 뜨겁다. 특히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후, 신춘문예나 각종 공모전에 예전보다 많은 작품이 투고되고 있고, 외국 소설에 비해 한국 소설의 판매량 비율도 늘어났다고 한다. 외국에서도 한국 문학의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K-문학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을 예전엔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미래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뉴욕책-서점지도
3.
2001년부터 한페이지 단편소설(1pagestory.com)이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했다. 한때 만 명에 가까운 회원들이 활발히 글을 올렸고, 작가로 데뷔한 분들도 많다. 자체적으로 20여 권의 책도 제작했다. 나는, 누구나 한 페이지 정도의 소설은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짧은 소설을 쓰다가 그것을 엮어서 장편소설을 만들어 자비출판을 했고, 나중에는 진짜 작가가 되었으니까. 사이트가 활발히 운영된 이유 중 하나는 혼자 글을 쓰던 사람들을 오프라인 모임으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픽션 워크샵이라는 이름으로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다. 낭독회도 수시로 개최해서 자신의 소설을 발표하고, 감상을 나누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면, 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는 느낌이 들었다. 글은 사람의 거울이니까.
한페이지 단편소설 작품집
작품 활동 등으로 사이트를 잠정 폐쇄했다가(2018) 다시 손을 봐서 열었고(2022), 현재는 소소하게 운영하고 있지만 회원들의 활동이 예전만 못하다. 한 시절의 흐름이 지나고, 그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기분이다. 만약 그때 짧은 소설을 웹소설로 연재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더라면 나는 지금 큰 사업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돈을 엄청 많이 벌어서 전 세계를 여행하고 있을까? 어쩌면.
4.
부산에서 제주도로 이주한 이후(2015)로는 책을 많이 사지 않는다. 이삿짐센터에서 가장 싫어하는 짐이 책이다. 대부분의 책을 중고 서점에 팔거나 나누어주고 이사 왔다. 요즘엔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거나 전자책을 산다.
트렁크에 책을 가득 담고 여행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왜 변했을까? 책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건가? 그럴 수도. 하지만 책 안에 들어 있는 이야기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대감도 여전하다. 이야기를 읽고 공감하는, 보이지 않는 독자들을 늘 생각한다. 아마 종이책이 다 사라지더라도 그런 보이지 않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은, 그것이 보이지 않기에 종종 잊혀져버린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연결성’이 아닐까?
팔로워가 수십만, 수백만 명인 연결성이 아니라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 간의 연결. 모바일 시대가 가져다준 혜택이 있다면, 그런 연결을 더 쉽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이런 연결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이제는 볼 수 있게 되었다.
작가와 작가, 작가와 독자, 독자와 독자들이 책이라는 매체를 넘어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플루언서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작고 느슨한 연결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흥미를 잃게 되면 곧장 팔로우 취소를 할 수 있는 연결이 아니라 사람과 작품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만들어내는 것. 그래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작가의 가장 큰 역할이지만 결국, 그런 연결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요즘 시대에 작가가 해야할 일이 아닐까? 그래야 이 세상에 책이 사라진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서진
《부산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 전자공학을 전공했는데 어찌 어찌 하다보니 소설가가 되었다. 또, 어찌 어찌 하다보니 어린이, 청소년 소설을 쓰게 되었고, 남은 시간에는 피아노를 치면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