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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잇다 | 대담

끈!
예술의 힘으로 서로 다른 매체, 세대, 희망을 엮어가는 사람들

진행정재운
대담성백, 이광현, 홍승이
정리양영석 사진권순일

겹겹이 피어난 꽃잎들, 어느 한 장 떨어지는 일 없도록 느슨히 묶는다
솜씨 없는 노래, 어긋나는 붓질, 비문으로 쓰인 문장이면 어떠랴
모든 걸 끌어안는 하류의 하구처럼 복수 개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 묶음 건네고 싶다
그들의 연대, 지속을 위한 약한 연결들
그래, 강하게 움켜쥐었던 것들이 끝내 풀어지지 않는 걸 본 일은 이날 입때껏 없었으니까
진행 정재운
오늘 모신 세 분은 작품활동을 이어오는 아티스트이자 기획자라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각자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성백 저는 시각예술을 전공, 최근에는 문화기획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제가 뭘 하는지 모를 정도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데, 간혹 눈에 보이는 일은 다 하고 있다고 해서 ‘시각예술가’라는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운영하는 공간에서 젊은 작가들과 실험적인 작업도 하고 있고 전시 장소를 구하지 못하는 작가들을 위해 대관하는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닥치는대로 일하는 시각예술가’ 정도로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각예술가 성백
이광혁 음악하는 이광혁입니다. 지금도 네 개 정도 밴드를 운영하고 있고 필드에 머무르면서 지속 가능한 예술활동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모든 활동을 연결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단체를 만들고 기획과 운영을 하게 되고, 지역도 옮겨가며 음악 활동에 도움 되는 아웃풋으로 이끌어내려 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 각각의 팀 활동을 통해 각기 다른 역할과 자아로 활동하면서 트리거, 그러니까 사건의 촉발자, 발화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음악가 이광혁
홍승이 저는 중앙동 40계단 옆에서 조그만 연습실을 운영하고 있고, 극단 <밖>의 대표이자, ‘아시아 미트 아시아’ 부산 지역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노동문화 예술단 <일터>에서 기획보조로 입단했는데, 어떤 계기로 배우의 길을 오래 걸어왔습니다.
감독 홍승이
여러분들이 경험하신 최초의 예술은 무엇이었는지? 전업 예술인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한 계기가 있다면요?
성백 어릴 적에 태권도와 유치원을 결합한, 오묘한 학원을 다녔어요. 하루는 배추를 놓고 그림을 그렸는데… (왜 거기 배추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웃음.) 그날 선생님께서 어머니께 “얘가 배추를 잘 그리더라”는 얘길 엄청 하신 거예요. 그때 들었던 칭찬이 오늘의 저를 만든 시발점이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전업작가가 되고자 마음먹은 건 2002년 월드컵 무렵이었어요.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조각 작품 공모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당시 저는 영도의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틈틈이 응모 준비를 하면서 ‘당선되면 조각에 전념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그리고 그 희망이 정말로 이뤄진 거예요. 그날로 바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조각활동에 전념했어요. 대담을 진행하고 있는 갤러리 앞에 세워진 동상이 바로 그 작품입니다.
이광혁 초등학교 장기자랑에서 노래하고 춤춘 것이 제 예술활동의 처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러니 자연히 허세나 멋있어 보이는 걸 좇기보다 대중들과 소통하고 재미난 활동을 하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게 됐던 것 같아요. 사회성을 뺀 예술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생각도 하고 있고요.
항상 현재에 집중하는 타입이긴 한데, 대학 시절에는 예술인이라는 자의식보다는 운동가 내지는 활동가로의 정체성이 강했어요. 그것 때문에 군입대도 많이 늦어졌는데, 군 생활 동안 음악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곧 이십 대가 저물어가는 시점이었거든요. 그 결론으로 플랜A부터 C까지 만들어놓았는데, 그 옵션에 밴드 활동을 그만두는 선택은 없었어요. ‘뭐가 됐든 활동을 계속한다. 이후의 리스크는 감수한다’는 쪽으로 갈피를 잡았죠.
홍승이 초등학교 4~5학년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시골에 살았는데 놀거리가 마땅치 않잖아요. 주로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를 하다가 친구들과 유행가에 맞춰 춤추는 놀이를 했어요. 삼거리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이 구경을 오셨는데,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 보이는 것에 대해 즐거워하고 재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친구들과 함께 땀을 흘리면서 의견을 내고 동작을 연습했던 것이 제가 경험한 최초의 공연예술이었다고 생각해요.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공장에서 일을 했고, 거기에서 노조 활동도 하게 됐습니다. 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밖으로 나와 민주노총의 지부에서 문화부장으로서, 노동문화 활동을 본격적으로 알게 됐고, 노동문화 예술단 <일터>의 활동을 접하게 되면서 전업 예술가로의 삶을 시작하게 됐어요.
세 분 모두 제각각의 답을 들려주셨는데요. 역시 예술과 생활은 납작하게 요약될 수 없다는 걸 재확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계획적으로, 또 누군가는 순발력 있게 전업 예술인의 삶을 꾸려가고 계신데,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동안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활동이나 작품을 꼽아서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성백 2019년, <아츠버스 유라시아 횡단프로젝트>가 가장 의미 있고 기억에 남습니다. 시각예술작가들뿐만 아니라 무용가, 음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시너지를 발휘했던 프로젝트인데요. 아직 마무리가 되지 못했어요. 원래 계획은 2019년에 출발해서 시베리아를 횡단해 2020년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거였는데, 코로나와 우-러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로젝트를 끝마치진 못했습니다. 아츠버스는 6년째 베를린에 머물러 있어요. 최근 2~3년 동안은 유럽에서 한국 작가들의 이동수단이자 레지던스 공간으로 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실험적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 작업이야말로 작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꿈꾸는 활동일 텐데, 부산문화재단의 지원 덕분에 실천을 할 수 있었어요. 기회가 된다면 아츠버스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마무리하고 그간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싶습니다.
이광혁 저도 성백 작가님이 말씀하신 프로젝트에 참여했어요. 그 전엔 뮤지션으로의 접근 방식이 사고의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행위예술가들과 즉흥 작업을 경험하면서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저의 예술관, 세계관에 많은 변화를 주었죠.
홍승이 저는 제가 참여한 작품이 아니라 관람한 작품을 소개하고 싶어요. 2012년 타이페이에서 레지던시로 있었는데, 굴링실험극장에서 ‘아시아 미트 아시아’ 팀의 히로시 오하시 연출의 ‘광인일기’라는 작품을 봤어요. 그 작품이 저를 대혼란에 빠지게 했어요. 작품에 참여했던 작가들의 존재감, 당당함, 자신감, 생기, 작업을 대하는 열린 태도, 그들의 존재방식에서 충격에 가까운 자극을 받았죠. 다방면에서 활동을 하는 다국적 아티스트들이 신체의 언어를 활용해 공연을 펼쳤는데, 굉장히 많은 동시대 문제들이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하지?’ 생각하면서 몸살을 앓을 정도로 질투를 느꼈어요. 다음날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연출가를 찾아가서 같이 작업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세 분 모두 한 사람의 아티스트이면서 복수의 정체성을 가지고 계시죠.
몇 해 전 홍승이 대표님이 연출하신 ‘살로메, 40계단을 오르내리다’라는 작품을 봤습니다.
기획·연출자로의 홍승이와 배우로서의 홍승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홍승이 그 작품은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원작으로, 돌아가신 히로시 오하시 선생님과 같이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코로나 기간에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작업을 어떻게 이어갈까 고민하다가 후배들과 함께 해보자 결심했던 작품입니다.
배우나 퍼포머로서 작품에 참여할 때나 연출은 완전히 달랐던 것 같아요. 배우는 제 몸이나 감각, 표현에 집중하면 되고, 연출가가 제시한 비전 안에서 자유롭게 자기의 창의성을 발휘하면 되는 작업이죠. 특히나 서사를 전달하는 일반적인 배우로서의 역할보다도 오하시 선생님과의 작업을 통해 몸의 감각을 확대하고 표현을 다듬어내는 데에 집중하는 배우의 역할은 연출가가 제시하는 전체적인 방향에서 관객과 직접 호흡하고, 순간순간 내 안의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이 배우의 작업이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제가 연출자로의 경험은 많은 편이 아니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연출가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소통능력도 부족한 데다가 독선적이기까지 하고 또 저를 낮추고 희망을 얘기해야 하는 태도 역시 부족했다는 것을 통감했어요. 아울러 연출은 작품이 사회와 만나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고, 그 작품을 사회에 설명해야 하는 책임감과 중압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백 작가님, 이광혁 선생님도 수행하고 있는 여러 역할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에 대해 간략히 소개를 해주시고, 어떤 정체성이 가장 잘 맞는 옷인지 이야기 얘기해주세요.
이광혁 밴드 활동을 계속하면서 영덕에 거점을 마련해 지역을 잇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획, 제작, 연출자로의 롤도 수행하게 됐어요. 그런데 최근 가장 집중하고 있는 역할은 ‘아빠’입니다. 아이가 생기고 생활적 압박을 받다 보니 예술가로의 정체성도 위협 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부처님이 아들의 이름을 ‘라훌라’(Lahula, 장애물)라고 지은 마음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전까지는 수익을 좇는 사업이나 활동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사업을 더 많이 배치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 상황이 장애라고 생각하진 않기로 했어요. 후배들 중에는 ‘예술 하면 결혼도 못 하고 자식도 못 낳는 거 아니야?’ 생각하는 친구들도 많은데, 제가 이 자리에서 아빠로의 역할을 잘 수행해서 후배들에게 증명하고 싶어요. ‘예술가도 사랑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다!’라고요.
성백 전 고등학교 때는 한국화를, 대학에서는 조각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첫 개인전은 퍼포먼스를 했거든요. 대학 시절 지도교수님이 엄청 혼을 내셨어요. ‘열심히 조각을 가르쳐놨더니, 하라는 조각은 안 하고 먹물이나 마시고 있냐’라고 하셨죠. 아마 당신께선 제자가 당췌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셨을 거예요. 질문대로 수많은 정체성을, 저만의 색을 찾아 헤맨 지난날이었습니다.
지금은 기획자로의 역할이 70퍼센트, 작가로의 역할이 30퍼센트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창작 활동 비중을 높여서 그 비율을 5대5로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지금의 저를 만들어 준 것은 부모님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해요. 배추를 잘 그렸다고 칭찬해주셨던 어머니는 30년 전에 돌아가셨고, 최근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어요. 두 분의 이야기를 내 작업에 어떻게 녹여낼까, 그분들이 내게 줬던 정신적·육체적 유산을 어떻게 끄집어낼까 하는 고민을 오랫동안 진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다음 질문은 성백 작가님과, 홍승이 대표님에게 드리는 질문입니다. 두 분의 예술 세계에는 언어라는 표현 매질의 위상이 높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홍승이 대표님의 경우 의미 전달의 주된 방식이 퍼포먼스이고 반언어적 경향이 강하고, 성백 작가님은 표현의 순간에 발생하는 그 무엇을 포착하려는 욕망에 중심을 두고 계신데요. 두 분은 어떤 끌림에 주목해서 작업을 하시는지, 그 창작 과정을 독자들에게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성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 일상의 모든 것이 작업의 밑재료가 되죠. 일례로 ‘1999년 1월 29일 가족사’라는 제 작품이 있어요. 병상에 누워계시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조각으로 만든 것인데, 굉장히 개인적인 경험이죠. 그 죽음을 바라보는 개인적인 시선들… 그 개인적인 아픔은 누구의 것일 수도 있거든요. 예술은 개별자의 삶을 그려냄으로써 보편적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니 말입니다. 최근에는 이탈리아 작가와 협업을 했는데, 그 작가가 말하길 이스라엘 전쟁물자와 팔레스타인 구호물자가 이탈리아 남부 항구에서 출발한다더라고요. 그런 경험, 사회적 이슈로 창작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 게 재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홍승이 저는 반언어적인 예술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언어가 너무 많아요. 항상 언어가 내 눈에 흐르고 있고 온몸이 언어로 둘러싸여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끌림에 주목하느냐… 저는 절박함에 관심이 있습니다. 연민이나 분노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에 오랫동안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아요. 과거 <일터> 시절에는 메시지를 강하게 표현했던 거 같아요. 부당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분명한 서사를 전달하기 위한 작업을 했다면,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2012년 ‘아시아 미트 아시아’의 작품 이후로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장면마다 많은 이미지를 불러일으켰고 제 스스로 사유하게 하고 고민으로 이끌었던 관람 경험이었어요. 언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언어가 있었던 거예요. 공연예술이 즉각적이고 즉발적으로 교감하는 작업이라고 했을 때, 동시다발적 감정을 문장으로 다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은 늘 하고 있어요.
이광혁 선생님께도 질문은 안 드릴 수가 없는데요.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저 같은 사람들은 이광혁이라는 음악인이 추구하는 스타일은 대중을 흥분시키는 데에 특화된 장르다, 삶의 비의를 포착하거나 들여다보려는 쪽과는 거리가 멀다는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선생님이 추구하는 음악은 어떤 색깔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광혁 아마 저를 백만 촛불집회에서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100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공연했다는 것은 복 받은 기회이자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는데, 예로부터 저항예술은 항상 존재했던 것이고 젊은 시절 그것에 집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목적지향적인 음악 활동을 해온 시간이 길었던 것인데, 이후에는 전과 다른 음악들도 하고 싶어서 여러 밴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십 대부터 사오십 대까지 협업하면서 세대 갈등을 넘어서서 다른 자아들과 함께 작업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미학적 발견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저도 가장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한 사람의 예술인이 아티스트로서의 성취에만 전력을 다해도 그 정수에 닿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여기 모인 세 분은 복수의 정체성을 갖고 계신데요, 그것이 단순히 다재다능하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같은 삶의 방향성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성백 같은 경우엔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시절이라는 청년기를 누구보다 잘 그려내는 일에만 집중하고 사회적 평가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잘났다고 해서 성공이 직결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사회적 시스템 안에 순응해야 하죠. 주변의 갤러리 전속 작가들을 보면 그림 하나하나의 방향성까지 지시를 받기도 한다더라고요. 그만큼 현장에서 작가로의 성공이 쉽지 않다는 것인데, 저는 그런 폭력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수평적인 시스템 안에서, 제가 만든 공간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실험적인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획자인 동시에 창작자로서, 동시다발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 같습니다.
홍승이 성백 작가님이 말씀하신 부분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기획 보조로 입단했던 <일터>에서 배우가 필요한 작품이 생겨서 단역으로 출연하게 됐고 나아가 배우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거예요. 연출이나 기획자로서의 정체성은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위한 시기마다의 선택이었고요. 연극 종사자로서 연동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때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 요구되는 역할이 있으면 거기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 마다하지 않다 보니 지금의 제가 만들어졌고, 덕분에 많은 경험을 통해 연기의 세계도 풍부해진 것 같습니다.
이광혁 저는 지역에서 예술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페르소나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요. 예술가들은 작품마다 혹은 역할마다 그것을 잘 바꿔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끈질김과 집요함도 중요하지만, 저처럼 페르소나의 전환이 빠른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제가 속한 씬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최선을 다해 새로운 페르소나에 적응하면서 살아왔어요.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공적인 인간이 된 것 같아요.
다음 작품으로 구상하고 계신 바를 소개해주신다면?
홍승이 저는 극단 ‘밖’과 주요하게 협력하고 있는 ‘아시아 미트 아시아’ 조직과의 작업을 이어나갈 생각이에요. 아시아의 민주주의에 관한 작품을 꾸리면 어떨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배우로서의 감각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도 가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설픈 연출로 몇 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것을 반성하며 온전한 연출로 한 작품을 완성하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이광혁 최근에 만든 <7번 국도>라는 팀 활동을 통해 대중적인 소통을 하고 싶어요. 젊은 친구들과 작업하며 사랑 노래도 만들고 앨범도 내려고 합니다. 굿에 중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는 <루츠리딤>이라는 팀도 있습니다. 듣는 이들의 안녕과 행복을 빌어주는 작업을 하는데, 음원화시킬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을 하지는 않고 있는데, <틀에디션>이라는 팀 활동은 부산이라는 끈과 저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젊은 연극 작가들과 킬라몽키즈 춤꾼들과 함께하고 있는데, 저는 음악감독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올해 6월 동유럽 투어를 다녀왔고, 오는 1월에 칠레, 2월엔 마카오 투어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성백 곧 맞게 될 50대에는 창작자로서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아까 말씀드렸던 아츠버스를 내년에는 꼭 한국으로 다시 가져오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아마 이광혁 선생님도 같이 해주실 걸로 믿습니다. 아츠버스는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해야만 하는, 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두루 공감해 주셨으면 합니다.
끝으로, 여기 모인 분들은 앞으로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이광혁 귀감이 되는 좋은 뮤지션, 후배들의 삶에 선택지가 될 수 있는 선배가 되었으면 합니다.
홍승이 제가 이상한 짓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열정적이고 성실하게, 발랄하게 작업하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성백 ‘답다’ 내지는 ‘다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선배다운 사람, 기획자다운 사람, 창작자다운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정재운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고, 다다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소설집 「경이로운 동그라미」(강, 2024)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