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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잇다 | 숨은 공간 소개

흩어진 사유의 끈들을
느슨하게 이어가기

이보리

예술을 둘러싼 논의가 파편처럼 흩어지고, 지역에서는 비평의 자리가 급격히 줄어들며 사유가 머물 공간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현장에서는 비평을 필요로 하지만, 그 현장을 사유하고 확장할 언어를 공급할 구조는 희박하고, 예술가들 마저 자신들의 작업을 깊이 있게 되짚어 줄 사유의 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체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주체들이 남긴 사유의 끈들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고 느슨한 연대로 이어지며 조용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쌜러드(ssalad.com)는 바로 그 느슨한 연대로 만들어진 온라인 속 공간이다. 나는 다양한 주체들이 지역 시각예술을 기반으로 사유와 담론을 나누고 작가와 독자의 자리를 잇는 비평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이 공간을 만들었다. 이후 이러한 지향에 공감한 예술가, 기획자, 연구자 등 다양한 주체들이 하나둘 합류하며 쌜러드는 자연스럽게 자발적 비평 공동체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쌜러드 아이덴티티 디자인
쌜러드(ssalad.com) 화면

2019년 3월 첫 지면을 연 이후, 쌜러드는 ‘부산 중심의 로컬 시각예술 웹진’을 표방하며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로컬 웹진이라는 단어를 앞세운다 하더라도 이것은 쌜러드의 정체성에서 지역성을 강조하기 위한 선언적 의미가 아니다. 중심/주변, 주류/비주류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 따라 스스로를 경직된 위치에 고정시키거나 그러한 분절을 극복하는 거대한 명분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이 명칭은 그저 필진들의 삶과 작업의 무대가 자연스럽게 부산에 놓여 있었다는 현실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로컬이라는 말이 흔히 경계를 만들고 권력을 나누는 틀을 호출하곤 하지만, 쌜러드는 그 경계에 자신을 가두지 않으며 각자의 작업과 사유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는 열린 지면으로 작동해 왔다. 비평의 ‘위기’를 넘어서겠다는 거창한 대의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비평의 자리가 거의 부재하던 지역에서 서로의 사유와 감각을 이어 붙일 수 있는 작은 플랫폼을 만들고자 했을 뿐이다. 그렇게 이어온 시간은 거대한 성과로 측정하기에는 부족할지 몰라도, 쌜러드가 지역의 작업과 독자, 사유와 담론을 잇는 연결의 자리로서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작동하고 있음을 조용히 보여준다.

2023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부산 동시대 미술의 현황과 전망에 관해 이야기 하는 포럼 《우리들 이야기》에서
필자가 쌜러드를 운영하며 경험했던 이야기를 발표하는 모습
쌜러드에서 주최했던 로컬아티스트 프로모션 프로그램 <아트엘리베이션> 진행 장면.
더마루아트컴퍼니 박진희 대표가 부산의 신진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검토하고 피드백해주는 모습

쌜러드는 물리적 지면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분량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싣는 것이 가능하다. 고화질의 컬러 이미지와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함께 제시할 수 있어 비평 대상의 시각적 정보 또한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와 같은 비물리적 기반은 글이 지닌 형식과 감각을 더욱 유연하게 확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고, 때로는 인쇄매체에서 다루기 어려운 서술과 실험을 담아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구조는 비평이 하나의 정형화된 형태에 고정되지 않고, 각자의 사유가 갖는 결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펼쳐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쌜러드는 단순히 글이 모여 있는 아카이브가 아니라, 지역의 비평적 사유가 머물고 다시 이어질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두는 하나의 공간이다. 그 안에 쌓인 텍스트들은 결과물임과 동시에, 서로 다른 관점과 감각이 놓일 자리를 마련해온 흔적들이다. 쌜러드는 비평이 쉽게 단절되는 지역 환경 속에서 작지만 꾸준한 버팀목이 되어 왔고, 다음 사유가 스며들 수 있는 자리를 묵묵히 비워두고 있다.

사유의 끈이 이어지는 방식 역시 이 공간이 품은 느슨한 구조 속에서 가능해진 일이다. 강하게 조이지 않아도 유지되는 연결과 흩어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흐름은 쌜러드를 지탱해온 힘이며, 지역의 비평을 앞으로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쌜러드는 그 끈 위에서 오늘도 사유가 머물 자리를 조용히 열어두고 있으며, 또 다른 결의 사유를 가진 누군가가 이 공간과 느슨하게 맞닿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이보리

부산에서 15년째 활동해온 기획자이자 디자이너로, 예술을 둘러싼 사유를 기록하고 확장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현재 뮤트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전시기획, 출판, 아카이브 연구, 디자인 등
시각예술 기반의 다양한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